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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永武

崔永武

1885. 5. 11 ~ 1952.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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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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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여주(驪州)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여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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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여주군 북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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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5년 5월 11일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북내면(北內面) 오금리(五今里, 현 여주시 오학동)에서 태어났다.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였다. 1919년 4월 3일 여주군 북내면 당우리(堂隅里)에서 거행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북내면의 만세운동은 4월 2~3일 천송리(川松里)와 당우리를 중심으로 각각 전개되었다. 4월 2일 신륵사의 승려 김용식(金用植)은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며 천송리 주민 수십 명을 규합한 후, 밤 10시경 여주 읍내를 향해 행진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당우리와 오금리 주민 백 수십 명이 동참하였고, 2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여주 읍내 한강변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3일 당우리에서 거행된 만세시위는 경성공립농업학교 학생인 이원기(李元基), 북내면의 이원문(李元文)·원필희(元弼喜), 강천면(康川面)의 조경호(趙經鎬) 등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여주 사람들을 ‘전국적인 만세운동에 호응하지 않는 개·돼지’라고 조롱하는 데 분개하여 독자적으로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4월 5일 여주 읍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읍내의 다락문 앞에서 궐기할 것임을 예고하는 「독립선언서」와 북내면 주민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경고문」을 작성하여 필사한 뒤 여주 일대에 배포하였다. 한편 4월 2일 북내면 면장 조석영(曺錫永)이 주재소에 불려 가는 일이 발생하였다. 다음날인 4월 3일 이러한 소식을 듣고 오금리와 현암리(峴岩里) 주민들을 이끌고 면장을 석방하고자 주재소로 갔으나, 이미 풀려났다는 말을 듣고 귀가하였다. 도중에 강만길(姜萬吉)·강두영(姜斗永)·최명용(崔明龍)과 뜻을 같이하여 당일 궐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이원기 일행을 만나 4월 5일로 계획하였던 만세시위를 함께 하자고 설득하였다. 이어서 장암리(長岩里)·덕산리(德山里)·외룡리(外龍里) 등을 순회하며 ‘참가하지 않는 집에는 불을 지를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그날 밤 500명이 넘는 주민들을 이끌고 당우리의 공북학교(拱北學校)로 집결한 후 이원기에게 받은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서 만세를 선창하였다. 그리고 시위대를 지휘하여 북내면 일대를 행진하며 만세를 외쳤다. 이어서 시위대를 지휘하여 여주 읍내를 향하여 이동하다가, 오학리(烏鶴里) 일대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주헌병분대 일제 헌병들의 총격을 받고 시위대와 함께 해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원기 등과 함께 붙잡혀 만세시위 주도자로 지목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5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며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다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며 만세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였지만, 그해 10월 27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다가 1920년 7월 27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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