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正斗
崔正斗1898. 12. 30 ~ 1930. 1. 2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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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8년 12월 30일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 진원면(珍原面) 산동리(山東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가(農家)의 자제로 서울에서 유학하고 있었으며, 3월 10일 전남 광주군 광주 읍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준비·참여하였다. 서울에서 거주하던 중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을 목격하였다. 이 무렵 도쿄(東京)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유학하다가 2·8독립선언을 계기로 서울로 귀국한 정광호(鄭光鎬)를 비롯해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던 김범수(金範洙)·박일구(朴一求) 등과 접촉하여 독립선언서 및 경고문을 전달 받고 만세운동에 함께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이후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광주로 내려와 있다가 3월초 광주로 내려 온 김범수·김기형(金基亨)·정광호 등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인쇄·반포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다른 루트로 서울에서 내려온 김철(金鐵)을 비롯하여 서정희(徐廷禧)·홍승애(洪承愛)·최한영(崔漢泳) 등도 가담하여 만세운동의 규모는 점차 커져갔다. 3월 6일 밤 남궁혁(南宮爀)의 집에 김복현(金福鉉)·김강(金剛)·송흥진(宋興眞)·최병준(崔丙俊)·김용규(金容奎)·한길상(韓吉祥)·김태열(金泰烈)·강석봉(姜錫奉) 등과 모여 3월 8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태극기 제조 및 인쇄물의 등사(謄寫)를 맡아 준비에 돌입하였다. 처음에는 남궁혁의 집에서 인쇄를 하려 하였으나, 숭일학교(崇一學校)에서 가져온 등사기(謄寫機)의 상태가 불량하고, 일제 관헌이 감시하는 낌새가 보여 여러 차례 장소를 옮겨야만 하였다. 이로 인해 거사 일정은 연기되었다. 이후 김언수(金彦洙)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최한영 소유의 등사기를 가져와 인쇄물 등사를 진행하였다. 이때 작업은 김용규·범윤두(范潤斗)·김종삼·한길상·최한영 등과 함께 하였으며, 독립선언서 약 1,500부, 경고문 및 독립가를 각각 200부 가량 등사하였다. 인쇄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3월 10일 광주 읍내의 작은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해당 등사지의 대부분은 김강과 김태렬이 가지고 가 다시 사람을 정해 나눠주어 거사 당일에 거리에 배부하도록 조치하였다. 3월 10일 오후 2시 30분경 부동교 아래의 장터에 1,0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가 고창되었으며, 동시에 양림동(楊林洞)·북문(北門)·지산면(芝山面) 방면에서도 각기 만세운동이 일어나 광주 읍내를 행진하였다. 초반에 시위대의 기세에 눌려 강한 제지를 하지 못하던 일제 헌병은 시위대가 점점 불어나자, 기마 헌병은 물론 소방대, 퇴직한 재향군인들까지 동원하여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해산시켰다. 이로 인해 100여 명이 붙잡혔으며, 오후 5시를 기하여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붙잡혀서 심문을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6월 1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해 9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이후 광주 지역에서 민족운동에 헌신하였다. 1923년에 민립대학기성회 광주지방부에서 활동하였고, 1926년에는 광주유학생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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