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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初

韓國初

1888. 12. 18 ~ 1941.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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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韓國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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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성(安城)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안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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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6)

관련 사건

  • · 안성군 안성읍내 장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6) 1888년 12월 18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읍내면(邑內面) 동리(東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한국초(韓國草)이며,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서원국초(西原國草)를 썼다. 고향에서 연초제조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꾸렸다. 1919년 3월 말 안성군 읍내면 장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안성군 읍내면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1일 50여 명이 봉기한 이래 4월 초까지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이중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했던 시위는 3월 30일부터 4월 1일 사이 약 3일간 안성장터를 중심으로 전개된 시위였다. 면민과 상인 수백에서 수천 명이 모여 연이어 만세를 불렀다. 3월 30일 밤 8시 동리와 서리(西里) 주민 500~600명이 만세를 외치며 봉기하였다. 각 상점을 돌며 문을 닫고 시위대에 합류할 것을 독려하는 한편, 평소 자신들을 수탈하던 식민통치 기구인 면사무소·경찰서·군청으로 몰려가 돌을 던져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 순사보 1명을 처단하였다. 3월 31일 오후 4시 기생이 앞장서 만세를 부르자 1천여 명의 군중이 이에 호응하여 다시 수탈기관 공격에 나섰다. 이날 밤 7시 30분 시위대 규모는 3천여 명에 달하였다. 면장의 간곡한 부탁에 횃불을 들고 만세를 연호한 뒤 해산하였다. 4월 1일 일제 헌병이 삼엄한 경비를 펼쳤기에 시위가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만세운동의 열기를 이어가고자 같이 연초 제조 및 소매에 종사하고 있던 윤순철(尹順哲)·고성준(高成俊)과 함께 낮 동안 담배대를 이용하여 태극기 70여 매를 제작하였다. 이날 밤 저녁 8시 일제 헌병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안성장터로 이동하여 이를 면민들에게 배포하고 앞장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면민 500여 명이 호응하여 다시금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6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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