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泳鎬
韓泳鎬1877. 2. 20 ~ 1944. 12. 2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간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함흥군 함흥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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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7년 2월 20일 함경남도 함흥군(咸興郡) 함흥면(咸興面) 중하리(中荷里)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인이며 목재상이었다. 1919년 3월 3일 함흥군 함흥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거행하기로 한 계획에 참여하였다. 함흥군의 만세시위는 평양 숭실중학교 교사인 강봉우(姜鳳羽)가 1919년 2월 26일 함흥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강봉우는 함흥면 신창리교회에서 함흥지역의 목사·장로들을 대상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정세와 식민지 조선의 처지를 설명하면서 향후 독립에 대한 준비를 역설하였다. 이어서 원산(元山)의 광석동교회 장로인 이순영(李順榮)이 함흥면 중하리교회로 와서 3월 1일 원산에서 만세시위를 거행할 것임을 알리고 함께 궐기할 것을 촉구하였다. 2월 28일 김두석(金斗錫)·김여학(金麗鶴)·김중석(金仲錫)·박성호(朴聖浩)·오명근(吳明根)·이순기(李舜基)·이영식(李榮植)·임회영(林晦榮)·조동훈(趙東薰)·조영신(趙永信)·최명학(崔明鶴)·최영학(崔榮鶴)·홍기진(洪基鎭) 등과 함께 중하리교회에 모여 만세시위 준비를 위해 5원에서 100원씩을 갹출하고 조직을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영신학교 교사 이근재(李根載)·함흥기독교청년회 서기 이순기·전도사(傳道師) 조영신·신탄상(薪炭商) 홍기진과 함께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들과 함께 거사일을 3월 3일로 정하고, 함흥 지역 주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참여를 권유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거사 당일에는 최명학(崔明鶴)이 낙민루(樂民樓)에 올라가서 나팔을 부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만세시위를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3월 1일 읍내에서 김기섭(金基燮)·도상록(都相祿) 등에게 장날인 3월 3일 거행될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도록 권유하였다. 하지만 3월 2일 사전 계획과는 무관하게 함흥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면서 출동한 일제 군경에게 300여 명이 체포당하였다. 이어서 일제 경찰은 3월 3일 새벽부터 함흥 전 시내에서 대대적으로 예비검속을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를 준비하던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해 7월 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그해 9월 1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에는 함흥노동회(咸興勞動會) 회장과 신간회(新幹會) 함흥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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