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雲錫
韓雲錫1884. 6. 18 ~ 1950. 2. 1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서산군 정미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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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4년 6월 18일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 결성면(結城面) 금곡리(金谷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1915년 5월 20일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 도이리(桃李里)로 이주하였다가, 이후 대호지면 조금리(調琴里)로 주소를 옮겼다. 의령남씨(宜寧南氏) 문중에서 설립한 도이리의 도호의숙(桃湖義塾)과 남주원(南柱元)이 설립한 사성리(沙城里)의 반곡서당에서 강학 활동을 하였다. 1919년 4월 4일 서산군 정미면(貞美面) 천의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서울과 전국 각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소식은 서산군에도 전달되었다. 서산군 대호지면에서는 면장 이인정(李寅正)을 비롯하여 면서기 김동운(金東云)·강태완(姜太玩)·민재봉(閔載鳳)과 면사무소 직원 송재만(宋在萬) 등이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이들은 인근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뒤 대호지면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거사일은 천의장터 장날인 4월 4일로 정하고, 사전에 면내의 각 마을별로 연락망을 구성하였다. 다수의 주민들을 만세시위에 참여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도로수선병목정리(道路修繕並木整理)의 건」이라는 공문을 각 마을에 보내 도로 보수를 위해 한집에 한명씩 4월 4일 면사무소로 모이라는 내용을 전달하였다. 한편 4월 3일 저녁 송재만으로부터 천의장터 만세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시위에서 사용할 애국가의 작사를 요청받았다. 만세운동의 취지에 크게 공감하여 “간교한 일본의 강폭한 주장에 끝내 우리나라 억지 강탈당해/우리 통탄(痛歎)을 조우(遭遇)하게 되니 살아 거소(居所)없고 죽어 장지(葬地)없네/이 원수들 갚지 않고 어찌하랴 각인 노력하고 한마음 협력해/불구(不俱) 대천(戴天) 원수들을 갚아 무궁전세(無窮傳世) 우리나라 독립하세” 라는 내용으로 작사하였다. 애국가 가사가 완성되자 송재만·민재봉·김동운 등과 함께 면사무소 등사판을 사용해 400장을 인쇄하였다. 동시에 송재만의 상의(上衣)를 만들기 위해 구입해 두었던 광목을 사용해 태극기도 1장도 제작하였다. 1919년 4월 4일 아침 면사무소에는 집집마다 1명씩 나와 담당구역의 도로를 수선하라는 공문의 내용에 따라 약 500명의 주민들이 집합하였다. 곧이어 대호지면장 이인정의 선창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후, 7(km) 정도 떨어진 천의장터로 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때 참여하여 오전 11시경 천의장터에 도착하였고, 시위대와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자 천의장터 염건피장(鹽乾皮場)에서 장터를 감시 중이었던 일본인 순사 우에하라(上原尙定)와 조선인 순사보 이재영(李在英)은 시위대를 향해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정미면 마을 주민까지 합세하여 1,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일제 경찰의 명령을 무시하고 계속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오후 3시경 만세시위를 마치고 시위대와 함께 술을 마신 후 귀가하려고 하는 순간, 급보를 받고 당진경찰서에서 파견된 일본인 순사 니노미야(二宮)와 다카지마(高島)가 도착하였다. 병력 증원으로 고무된 일제 경찰들은 태극기를 압수하고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려고 하였지만, 시위대의 저항이 거세지자 이들을 향해 권총을 발포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위대가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고, 두려움을 느낀 일제 경찰들은 천의경찰관주재소로 도망쳤다. 1,000여 명에 달하는 시위대과 함께 일제 경찰을 쫓아가 곧바로 주재소를 포위하였다. 이어서 주재소에 돌을 던져 창문을 깨뜨리고 내부로 진입해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였고, 시위대를 향해 권총을 발사한 일제 경찰들을 찾아내어 구타하였다. 시위대의 공격에 놀란 일제 경찰들은 황급히 주재소를 버리고 구시장(舊市場) 방면으로 도주하였지만, 시위대를 이끌고 추격하여 그들을 붙잡았다. 이때 일제 경찰을 구출하기 위해 시위대를 제지하려고 나선 일본인 다지리(田尻足穗)도 구타하였다. 시위대 20~30명을 이끌고 일본인 다지리의 집을 포위한 다음 창과 문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송재만·송무술(宋戊戌) 등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 후일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필요한 총포를 요구하였다. 다지리의 부인이 가지고 나온 엽총과 권총·탄환 등을 받은 후 집을 나왔고, 탈취한 물건은 대호지면 적서리(赤鼠里)의 덤불 속에 숨겨두었다. 4월 5일 대호지면의 만세시위가 격렬해지자 일제는 서산경찰서와 당진경찰서에서 추가로 순사 8명과 홍성수비대의 보병 5명을 증파하였다. 대호지면에 도착한 일제 군경은 일본인 14명을 서산 읍내로 철수시키고 천의주재소를 폐쇄하였다. 그리고 만세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강제로 연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1명이 사망하고, 21명이 붙잡혔다. 이때 다른 주도들과 함께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10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같은 해 1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다시 징역 1년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1920년 2월 7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다가 1920년 8월 6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노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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