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應敎
韓應敎1892. 1. 22 ~ 1950. 12.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2년 1월 22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외가천리(外加川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한춘식(韓春植)이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1일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陽城面)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일 저녁 8시 원곡면 칠곡리(七谷里)의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과 외가천리의 최은식(崔殷植)·이희룡(李熙龍) 등은 만세시위를 전개하기 위해 원곡면의 칠곡리·외가천리·내가천리(內加川里) 등 여러 마을의 주민들을 규합하였다. 이때 1,000여 명에 달하는 시위대에 합류한 후, 태극기를 앞세우고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양성면 동항리(東恒里)로 행진하였다. 4월 1일 밤 9시경 이미 양성면 동항리에서는 수백 명의 시위대가 양성면사무소와 양성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밤 9시 50분경 양성면 시위대는 만세시위를 마치고 해산하려고 준비하고 있다가 동항리에 도착한 원곡면 시위대와 만나게 되었다. 원곡면 시위대로부터 합류를 제안받은 양성면 시위대가 그 취지에 공감하여 합류하자 시위대는 2,000여 명으로 크게 늘었다. 밤 10시경 2,000여 명에 달하는 시위대와 함께 양성경찰관주재소로 이동하였다. 주재소에 도착한 후 다른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를 향해 투석전을 전개하며 창문 등을 파괴하였다. 이어서 일부 시위대가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자, 같이 내부로 따라 들어가 탁자와 의자를 끄집어내어 부숴버렸다. 이어서 시위대와 함께 양성우편소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최은식·김순서(金順西) 등과 같이 도끼를 사용하여 우편소의 전신을 절단하였다. 그리고 장덕관(張德寬)·김배관(金培寬) 등과 함께 우편소의 전주를 넘어뜨리고, 내부로 들어가 책상이나 의자 등의 기물을 파괴하였다. 시위대 일부는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집과 일본인이 운영하는 잡화상 등을 공격하였다. 다음날인 4월 2일 새벽 4시경 원곡면에서 출발한 시위대와 함께 돌아왔다. 그리고 최은식·남현서(南玄西) 등과 함께 원곡면사무소를 공격하기 위해 다시 외가천리로 향하였고, 원곡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돌을 던져 창문을 파괴하였다. 4월 3일 일제는 만세시위 주도자와 참여자 검거를 위해 일제 경찰과 조선주차군 제20사단 제40여단 제76연대 소속 장교 이하 25명을 투입하였다. 이후 일제 군경의 조사와 색출과정에서 4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검거되었다. 이때 다른 주도자들과 함께 붙잡힌 뒤 재판에 넘겨졌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죄, 소요죄 등으로 징역 1년 3월(미결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노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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