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一東
韓一東1891. 1. 27 ~ 1934. 4. 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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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1년 1월 27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함안면(咸安面) 북촌동(北村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9일 함안 읍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함안군의 만세시위는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고 1919년 3월 5일 돌아온 이찬영(李讚榮)·조한휘(趙漢輝)·한관렬(韓灌烈) 등 지역 인사들이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계획되었다. 이찬영 등과 평소 망국의 설움과 국권회복을 논하는 등의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의기투합하여 적극 참여하였다. 거사일은 함안읍 장날인 3월 19일로 정하였으며, 태극기 제작·독립선언서 등사·지역별 동지 규합과 군중 동원 등의 준비를 하였다. 3월 19일 정오 비봉산(飛鳳山)에서 고천제(告天祭)를 마친 후, 태평루(太平樓)에 태극기를 걸고 독립선언식을 하는 것을 신호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미 읍내 중심지 봉성동(鳳城洞)에 모여 있었던 수백 명의 시위대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지휘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규모가 점점 불어나 3,000여 명 규모로 확대된 시위대와 함께 함안경찰관주재소, 군청·우체국·일본인 학교·법원출장소 등으로 나아갔다. 함안경찰관주재소와 마산경찰서 일제 경찰이 만세시위를 탄압하자 시위대 역시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하였다. 단순히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제 식민지배 기관들에 돌과 기와 조각을 던지고, 내부로 진입하여 물리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면서 기물과 서류를 파손하고 일제 관리들을 제압하였다. 마산(馬山)의 일본군 수비대가 출동하여 시위를 탄압하자 시위대는 해산하였으며, 이후 일제 군경에 붙잡혔다. 1919년 5월 2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며 항소하였으나, 그해 8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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