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昌洙
韓昌洙1897 ~ 192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3)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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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3) 강원도 통천군(通川郡) 순령면(順嶺面) 하고저리(下庫底里)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97년생으로 추정된다. 잡화상(雜貨商)을 운영하였으며 통천군 순령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5일에서 7일까지 통천군 순령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3일 동안 일어난 만세시위 중에서 6일 만세시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첫날 시위는 5일 밤에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순령면 고저리는 통천군 중에서도 상업이 발달한 곳으로 일본인도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원산(元山)과 장전(長箭) 항구와 인접하였으며, 고저리에도 항구가 있었다. 이곳 고저리 항구의 부두 노동자 20여 명이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순령면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부두 노동자들이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자, 서당 생도들도 뛰어나와 시위에 합세하였다. 만세시위 소식에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군중은 어느새 20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항구 일대에서는 만세 소리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이날 시위는 일제가 경찰을 급파하여 무력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면서 하면서 끝이 났다. 6일, 둘째 날 만세운동은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농민과 어민, 상인 등 많은 주민들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시위였다. 평소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하였다. 같은 생각을 가진 이수정(李守丁)·임낙규(林洛奎)·이평수(李平銖)·남정민(南廷敏)·김필봉(金弼鳳) 등 마을 주민들도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낮에 시작된 만세시위는 저녁까지 이어졌으며, 저녁에는 1,300여 명의 군중이 구름처럼 모였다. 이수정·임남규 등과 시위대를 이끌고 항구와 마을을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와 함께 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우편소 등 관공서 건물을 돌과 몽둥이로 파괴하는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일본인 주택과 중국 상점도 부수는 등 일본의 식민통치에 강력하게 저항을 표하였다. 일제는 만세시위가 과격하게 전개되자 군인까지 동원하여 폭력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저항하는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아 무자비하게 대응하면서 2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마지막 날인 7일에도 항구를 중심으로 2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펼쳤다. 전날보다 적은 인원이지만 만세운동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저녁 8시에 시작된 만세시위에서 시위대와 함께 전날과 마찬가지로 관공서의 창문을 파괴하는 등 과격한 시위를 이어갔다. 일제는 만세운동에 즉각 대응하며 시위대를 향하여 총을 쏘아 강제로 해산시켰다. 1919년 7월 15일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중 30일 본형 삽입)을 받았다. 항소하면서 같은 해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을 취소하여 징역 1년 6월로 감형되었다. 다시 상고하여 취의문에 ‘민족자결 원칙에 따라 평화적인 방법으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독립운동과 만세를 부른 것은 국민의 마땅한 의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만세운동을 일본이 살해와 폭력으로 대응한 것’을 비판하면서, ‘맨손으로 정의와 인도로 만세를 부른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10월 11일 고등법원에서 그해 10월 11일 상고를 기각하면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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