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淸一
韓淸一미상 ~ 1919. 3. 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2002)
관련 사건
- · 수안군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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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02)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수안면(遂安面) 석교리(石橋里) 출신이다. 자료의 한계로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 수 없다. 천도교계 인물로서, 1919년 3월 3일 황해도 수안군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을 선두에 서서 지휘하였다. 수안군은 일찍이 천도교의 교세가 강한 지역이었으므로, 만세운동 또한 천도교인들에 의해 계획되고 주도되었으며 매우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수안군 만세 시위의 발단은 곡산의 천도교인 이경섭(李景燮)이 1919년 3월 1일에 서울에서 내려와 독립선언서와 천도교 중앙교구에서의 취지, 서울의 만세시위 소식 등을 수안읍의 천도교 교구장 안봉하(安鳳河)에게 전한 것이었다. 그날 안봉하를 비롯하여 김영만(金永萬)·나찬홍(羅燦洪)·최용식(崔鎔植)·이영철(李永喆)·홍석정(洪錫禎) 등 다른 천도교인들과 함께 수안군 각지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으며, 다음날인 3월 2일에는 천도교의 시일(侍日; 일요일) 집회를 이용하여 더 많은 천도교인들이 교구실에 모여 비밀 회의를 가졌다. 이들은 바로 이튿날인 3월 3일에 수안군의 교도들을 동원하여 읍내에서 지역의 만세시위 일으키는 매우 신속한 계획을 세웠다. 특히 수안군 만세운동에서는 만세시위와 더불어 그 곳에 주둔하고 있던 헌병분대를 쫓아내기로 하였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었다. 독립 만세 시위에 필요한 연락, 준비, 진행 등 제반의 실무 사항을 홍석정과 함께 담당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홍석정 등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고 대천(大千)·오동(梧洞)·연암(延岩)·공포(公浦) 등 수안군 각 면의 천도교도들에게 이 계획을 비밀리에 전달하였다. 그러나 헌병대의 엄중한 감시로 인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고 안봉하·김영만·나찬홍 등 주요 인사들이 시위를 일으키기도 전에 검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석정·이영철 등과 함께 계획대로 일을 실행해 나가 결국 3월 3일 아침 6시 많은 천도교인들을 읍내 천도교 교구실 앞에 규합하였다. 이때 이영철이 선두에 서고, 홍석정과 함께 중앙에서 2개의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시위대 130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시가 행진을 위해 대로로 나섰다. 시위대는 헌병분견소에 들어가 분대장 중위와 독대하고 헌병분견대 앞에 도달하자, 몇몇 인물이 사무실로 들어가 분대장 중위 야길광(野吉匡)과 독대하였다. 이 자리에서 “5천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를 병합하였다”, “우리들을 압박하고 자유를 빼앗아 갔다”고 일제 지배에 항의하여, 분대장으로부터 “서울 본부에서 연락이 오면 물러나겠다”는 서약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수안군 각지에서 천도교 교인들을 중심으로 규합한 만세 행렬이 읍내로 모여들었다. 시위대와 함께 다시 헌병대를 찾아가 물러나라고 요구하였는데, 헌병대가 무단 발포하여 사상자를 내고 일부를 강제 억류하였다. 그러자 홍석정이 지휘하는 150여 명이 넘는 시위대 무리가 다시 헌병 분대로 몰려가 이러한 만행에 항의하고 억류된 군민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때 헌병대가 비무장 군중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탄을 쏘며 강제 해산하고자 하였고, 이 과정에서 홍석정 등과 함께 사망하였다. 아들인 한병익(韓秉益)의 신문조서 증언에 따르면, 헌병대가 대문 입구에 금줄을 쳐놓고 넘어오지 말라고 위협하였으며, 실제로 넘어가지 않았는데도 발포하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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