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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有先

黃有先

1888. 3. 9 ~ 1974.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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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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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盈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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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1919년 영덕군 창수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888년 3월 9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창수동(蒼水洞)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영덕군 창수면 읍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당시 창수면에서는 신기동(新基洞) 등지에서 도로공사로 인하여 전답을 강제로 수용당한 주민들이 많아 일제의 통치 방침에 불만이 높았다. 마을 구장인 이현설(李鉉卨)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은 3월 18일 영해면(寧海面) 읍내 성내동(城內洞) 시장과 병곡면(炳谷面)에서 거행된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길을 떠나던 창수면 오촌동(梧村洞)·삼계동(三溪洞) 주민들과 조우하였다. 영덕군 내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영해면 만세시위는 영덕 각지에서 모인 약 2,0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였다. 이때 이미 만세시위가 발생한지 하루가 지난 시점에서 영해면으로 향하는 것이 이미 늦었다고 판단한 신기동 주민들은 창수면에서 자체적으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오촌동·삼계동 주민들도 이에 참여하기로 하고, 창수동 마을 구장이던 이수각(李壽珏) 등도 이에 찬성해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수각이 아들 이학술(李學述) 등과 집집마다 다니며 만세시위 참여를 권유할 때, 이에 찬성하여 창수면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3월 19일 1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이현설·이수각 등의 주도하에 창수경찰관주재소로 향하여 이동하였다. 인근 마을 주민들도 창수동 읍내로 집결해 시위대의 규모는 4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4시경 시위대와 더불어 만세를 부르며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일제 경찰들은 미리 다른 지역 만세시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대비하고 있었지만, 대규모 시위대의 공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를 공격하며 건물과 각종 기물을 파손하였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위대의 공격으로 주재소의 청사·숙사 등 건물이 거의 파괴되었고, 여러 기물·총·검·기타 공문서 등도 훼손되었다. 저녁 7시경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판단한 시위대와 함께 자진 해산하였다. 하지만 이후 일제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 등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며 항소하였다. 그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었으나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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