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章學
崔章學1909. 4. 11 ~ 1987. 9. 1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혁조회
- · 의열단
- · 광복군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혁조회 사건
- · 제2차 세계대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909년 4월 11일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동래면(東萊面) 교리(校里, 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장학(章鶴)·최장(崔章)·진가명(陳嘉明)이다. 부산제2상업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27년 동래고등보통학교 재학생 박인호·최두해와 부산제2상업학교에서 독서회를 주도하던 김규직(金圭直)·양정욱(梁正彧)이 뜻을 모아 독서회 조직을 강화하여 결성한 혁조회(革潮會)에 가입하였다. 동지들의 하숙집을 회합 장소로 하여 민족의식 강화와 장차 독립운동 실행을 위한 방략을 논의하였으며, 월간지 『흑조(黑潮)』 발간에 참여하였고, 부산 내의 민족의식이 투철한 학생들과 접선하여 동지로 포섭하였다. 1928년 6월 부산제2상업학교에서 민족 차별을 일삼던 일본인 교사들의 축출을 목표로 한 동맹휴학이 발생하자, 이를 사상단체의 배후 공작으로 판단한 일제 경찰의 탐문에 부산제2상업학교 내 혁조회 조직이 발각되어 김규직·양정욱·윤병수(尹炳洙) 등과 함께 1928년 12월 붙잡혔다. 혁조회 활동이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한 불온단체라는 일제의 판단에 따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1929년 9월 24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풀려났다. 그러나 일제는 혁조회원들을 수감한 채 모진 고문을 가하며 재판을 진행하였고, 미결수 기간은 9개월에 달하였다. 풀려난 후 동래청년동맹(東萊靑年同盟) 등의 단체에서 계몽활동에 종사하던 중, 동래 출신 의열단원 박문희(朴文熺)와 접선하여 1931년 10월 19일 부산항에서 연락선을 타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고, 김원봉이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와 제휴하여 난징(南京)에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에 입학하였다. 문길환(文吉煥)·이무용(李武龍)·김영배(金永培)와 함께 초급장교 교육과 공작 활동에 필요한 훈련을 받은 뒤 1933년 4월 20일 졸업하였다. 김원봉의 명에 따라 중국에 잔류하여 간부학교의 교관을 담당하다가 광저우(廣州)의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와 중산대학(中山大學)에서 공부하였다. 1935년부터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당원으로 활동하였고, 충칭(重慶)에서 조선민족혁명당 기관지 『망원경』의 편집책임자로 활동하며 글을 기고하거나 중국 내 논설을 번역하였다. 1937년 일제가 루거오차오(盧溝橋) 사건을 일으켜 중일전쟁을 도발하자, 1938년부터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소속으로 전선에서 중국 국민혁명군을 도와 유격전 및 선전·사기 저하 작전에 종사하였다. 1941년 최창익(崔昌益)을 중심으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華北支隊)가 분리되어 독자 행동하자, 김원봉을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1942년 5월 한국광복군이 2개 지대로 재편될 때 광복군 제1지대에 정식 입대하여 일본군을 대상으로 한 선전·심리전을 전개하였으며, 민족혁명당의 간부로서 중앙위원, 주임비서 등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국민혁명군을 도와 일본군 무장해제 작업 및 관할 내 치안 유지를 보조하고, 한국인들의 신변 보호 및 귀국 절차 원호를 담당하다가 1946년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조선민족혁명당 주석 김규식(金奎植)을 따라 민중동맹(民衆同盟)에서 활동하였고, 1949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제8기로 입교하여 국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조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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