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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光玉

崔光玉

1877. 8. 15 ~ 1910.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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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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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중화(中和)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중화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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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독립협회
  • · 태극학회
  • · YMCA
  • · 서북학회
  • · 신민회
  • · 안악면학회
  • · 해서교육총회
  • · 청년학우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관련 사건

  • · 105인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1877년 8월 15일 평안남도 중화군(中和郡) 대륵골에서 아버지 최윤조(崔允祖)와 어머니 이순문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고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만민공동회에 참가하였다. 아버지와 함께 기독교에 입교하고 독립협회 관서지부에서 활동하며 안창호(安昌浩)와 교류하였다. 1898년경 이광일(李光一)과 결혼한 후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1899년에 안창호가 세운 점진학교(漸進學校)에 교사로 초빙되었다. 이곳에서 교육 경험을 쌓으며 신학문에 대해 절실함을 느끼던 중 선교사 베어드(William M. Baird)의 권유를 받아 24세인 1900년에 신설된 숭실중학교에 진학하였다. 재학 중에 능력을 인정받아 조교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04년 졸업 후에는 숭실학교 교사로 채용되었다. 그해 5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하는 사범강습회에서 김구(金九)를 만났다. 일과를 마치면 김구와 시국을 토론하며 의견을 나눴고, 사범강습회가 끝난 후에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도 함께 참석하였다. 1905년 초 일본에 유학해 세이소쿠학교(正則學校) 예비과정에 입학하여 영어·수학을 공부하였다. 이어 도쿄(東京) 고등사범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며 시간이 나는 대로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의 저명한 교수 강의를 섭렵하며 학습에 열중하였다. 1905년 9월 장응진(張膺震)과 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太極學會)를 결성해 총무원으로 실무를 맡았으나, 궁핍한 생활로 인해 영양실조에 걸렸고 과로로 폐병까지 앓게 되었다. 도저히 학업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친구 김홍량(金鴻亮)과 귀국하였다. 투병 중에도 서울과 의주·평양 등지를 오가며 교육활동을 이어가는 열성을 보였다. 1906년 초가을에는 김홍량의 초빙으로 안악(安岳)의 연등사(燃燈寺)에서 요양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듣고 찾아온 김구 등 안악의 여러 인사들과 함께 국내외의 정세·민족의 진로·시국 타개 방안 등에 대해 토론하며, 근대교육을 확산하기 위해서는 교원 양성이 가장 시급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그해 12월 양산학교(楊山學校) 교내에서 안악면학회(安岳勉學會)를 결성하였다. 이를 통해 청소년들에게 민족자립사상을 고취시키고 학교설립과 교사 양성·농사기술 개량과 공업장려 등을 통한 구국운동에 나섰다, 1907년 2월에 평양에 세워진 군민회 산하에 교육부 임원으로 임명되어 교육방침의 기본을 통일시키고, 사숙의 교사들을 재교육시켰다. 또한 평양군수였던 백낙균과 교섭하여 면 단위로 학무총대(學務總代)를 선정해 각 마을에 사범강습소를 설치하도록 하고, 청년들에게 교사 교육을 실시하여 이들을 신설 학교 교사로 파견하는 식으로 교육을 확대해 나갔다. 같은 해 미주에서 입국한 안창호와 5년 만에 재회하고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평안도와 황해도의 인재들을 심사하여 신민회에 가입시키는 임무를 주로 담당하면서, 김구·안태국(安泰國)·차리석(車利錫) 등을 회원으로 영입시켰다. 평양 사범강습소의 사범 교육과정을 성황리에 마친 후 양산학교에 하기 사범강습소를 개설하여 방학 중에도 교사 양성에 매진하였다. 같은 해 봄에는 교육교재를 출판하면서 도서관과 서점 등의 역할까지 수행하는 면학서포(勉學書鋪)를 개점하고, 교과서와 참고서의 저술·출판·보급 사업을 시작하였다. 1907년 7월 3일 여름방학 기간에 비어있는 양산학교 교실에서 ‘무너져 가는 조국을 일으키려면 자녀를 교육시키라’라는 주제로 제1회 하기 사범강습회를 열었다. 당시 1개월간의 교육과정에 안악 인근 지역에서 70여 명의 강습생이 몰렸다. 안악면학회의 신교육운동은 국권회복운동으로 인식되어 대중으로부터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교육과정을 이수한 인재들은 황해도에 소재한 명신학교를 비롯한 많은 근대학교의 교사로 배치되었고, 이들에 의한 신교육운동은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그해 4월 15·16일 양일간 양산학교에서 열린 춘계대운동회는 37개 학교가 참여할 정도로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같은 해 가을에는 황해도 사리원 서쪽 10리쯤에 위치한 누루지(楡洞)라는 곳에 중학교를 세우고 그 주변에 모범농촌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안악면학회 회원 장윤근을 의주로 파견해 건축용 자재로 쓸 원목을 다량 구입하였고, 이태건 소유의 토지 일부를 모범촌 기지로 삼아 공사에 착수하고자 하였다. 당시 모범촌 공사의 건설 설계는 신민회 동지인 김필순에게 맡겼다. 1908년 7월에는 안악면학회 제2회 하기 사범강습회를 개최하였다. 그러자 인근과 평안도의 교육자, 경기도·충청도의 보통학교 교사, 교사가 되기를 희망하는 청년 등 400여 명이 모여들었다. 이때 역사·국어·과학 등의 과목을 담당하였다. 특히 불빛을 태양으로 둥근 물체를 지구로 가정하고, 둥근 물체를 빙글빙글 돌려 움직여 가며 자전과 공전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또한 여성의 임무와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면서 여성이야말로 사회를 건전하게 발전시키는 주요한 존재이므로 문맹타파는 물론 세계관을 넓혀주고 일상생활에서도 과학적 지식을 적용하도록 가르친다면 가정을 문명화할 수 있고, 가정이 이 사회와 국가를 문명화하면 나라의 독립을 되찾을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후 안악면학회의 교육활동은 한정된 지역주의를 초월하여 황해도 일대 모든 교육기관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교육 보급을 신속히 할 수 있는 체제로 진화되어 갔다. 그 결과 1908년 8월 22일 양산학교 내에서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가 조직되었고, 신민회의 황해도 조직 책임자로서 신민회 활동과 해서교육총회 활동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켰다. 1909년 7월 10일 제3회 하기 사범강습회를 개최하자 북으로 평북 의주에서부터 남으로 황해도 배천까지 700여 명의 수강생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이러한 모습을 본 도산 안창호가 “우리 삼천리 강토 13도마다 안악과 같은 고을이 하나씩만 생겨도 이 나라의 문명은 10년 안에 일본을 따라잡게 될 것”이라고 언급한 것처럼 안악은 황해도 제일의 신문화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일제로부터 배일의 근거지이자 ‘불령’한 지역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같은 해 안악 유지들과 함께 산업을 통한 구국 활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베틀보다 성능이 좋은 수직기(手織機)를 서울에서 가져다가 광목 짜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또한 서울에서 담배 제조 기계를 사다가 안악의 향기라는 의미를 담은 ‘안향(安香)’이라는 담배를 제조하여, 이미 연초 공장을 만들어 많은 판매이익을 취하는 일본인들과 맞서고자 하였다. 이어서 해서교육총회 교육단과 함께 배천(白川) 소학교에서 신문물인 환등기를 이용해 환등회를 열었다. 제일 먼저 고종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등장하도록 한 후 참여자들에게 국궁(鞠躬)하는 예를 갖추도록 하였고, 감시를 위해 출동한 일본인 사령과 경관에게까지 경의를 표하도록 하였다. 1910년 해서교육총회 교육단이 연백군 배천읍에 머물며 교육운동을 전개할 때 군수 전봉훈의 사저에 머물면서 각 면의 유지들과 교육시설 방침에 관해 협의하였고, 직접 배천의 청년들과 노동하면서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해 7월 19일 아침 청년들에게 연설을 하다가 쓰러져 의식을 잃자, 청년들이 급히 연백군 은천면 연남리의 진사 유재륜의 집으로 이송하였다. 하지만 그날 오후 5시 10분 끝내 사망하였고, 7월 22일 배천읍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역술서 『교육학(敎育學)』(1907)과 저서 『대한문전(大韓文典)』(1908)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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