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大鉉
崔大鉉1852. 1. 14 ~ 1931. 11. 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최대현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관련 사건
- · 1919년 양평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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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5) 1852년 1월 14일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강하면(江下面) 전수리(全壽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최대규(崔大奎)이다. 대한제국 시기 오위장(五衛將)을 지내었고,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에 참여하였다. 1919년 양평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해산되자 부하 700여 명을 이끌고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1919년 1월 13일 고종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금곡능(金谷陵) 앞에서 제사를 지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그해 2월 13일경 같은 마을의 강씨에게 제사에 필요한 비용을 모집한다는 내용으로 문서를 작성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같은 날 기부금 요청 문서가 완성되자 양자인 최윤식(崔允植)에게 이를 이용해 10여 장 인쇄하도록 하였고, 면사무소 등사기를 이용하여 10여 장을 완성하였다. 이 문서는 같은 달 하순경 양평군 11개 면의 면장들에게 각각 배포되었다. 그해 3월 전국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되자, 3월 31일 오후 11시경 강하면사무소 앞에 집결한 3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1일 오후 4시경에는 양평군 양서면(楊西面) 도곡리(陶谷里)에 위치한 양서면사무소와 대탄리(大灘里) 헌병주재소 부근에서 2,0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연달아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서울에서 온 학생 2명 등을 모아놓고 또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3일 오후 4시 양평군의 강상면·강하면·고읍면·양서면 등에서 모여든 약 4,000여 명의 사람들은 고읍면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양평군 갈산면(葛山面) 양근리(楊根里) 읍내로 가기 위해 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양평헌병분견소 일제 헌병들이 출동해 읍내 경계까지 진출한 시위대를 향해 해산할 것을 명령하면서 공포탄을 발포하였다. 일제 헌별의 총격에 놀란 시위대가 주춤거리자 앞으로 나와 만세를 부르며 참여자들을 독려하였지만, 고읍면 옥천리에서 만세시위 행렬이 멈추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제 헌병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최윤식을 포함한 다수의 사상자가 발행하였다. 그러자 다시 시위대 앞으로 나가 ‘전진하라’고 외치며 독려하였고, 다시 읍내로 이동을 시작한 시위대와 함께 일제 헌병을 향해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양근리(楊根里)까지 행진한 후 만세시위를 거행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10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기부금취체규칙 위반, 소요죄로 징역 10월(미결구류일수 중 90일 본형 산입)과 벌금 20원(불완납시 20일간 노역장 유치)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며 항소하여 그해 11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는 무죄를 받았지만, 다시 징역 6월(미결구류일수 중 100일 본형 산입), 벌금 20원(불완납시 10일간 노역장 유치)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최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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