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稚振
韓稚振1901. 9. 29 ~ 1955. 6. 2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륙공업제도학관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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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7) 1901년 9월 29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귀성면(貴城面)에서 태어났다. 영문명은 (Clarence C. Hahn)이고, 일제 말기에는 일제의 강요로 청산철인(靑山哲人)이라는 창씨명을 쓰기도 하였다. 어려서 한학자인 아버지로부터 글을 익히고, 사립 학림학교(鶴林學校)를 다녔다. 형인 한치관(韓稚觀)의 영향으로 1917년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南京)의 진징대학(金陵大學)에서 중학과정을 마쳤다. 중국 유학시절부터 일제로부터 ‘요시찰인’으로 지목되어 감시받았다. 1922년에는 유학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고, 1928년 로스앤젤레스의 남캘리포니아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한편 미국 유학 중에는 한국 독립을 주창하는 『삼일신보(三一申報)』의 발기인으로서 창간을 주도하였다. 이 일로 일제는 ‘민족운동의 급진적인 인물로 배일사상 소유자’라며 예의 주시하였다. 1929년 귀국하여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였다. 1932년 9월부터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심리학·종교학·사회학 등을 강의하고 이와 관련된 저서와 번역서 등을 출간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와 간섭이 계속되어 1936년 교수를 그만두고,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와세다(早稻田) 대학에서 철학 연구를 이어나갔다. 이곳에서 한국인 유학생들과 한국어와 민족문화에 대한 토론회를 갖고, 한국어 사용을 금하는 일제 당국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태평양전쟁기 국내로 돌아와 사직동에 대륙공업제도학관(大陸工業製圖學館)을 개설하고 관장으로 활동하며 지식인들과 교우하였다. 그러면서 당시 전쟁 상황에 대한 각종 신문 등을 섭렵하며 결국 일제가 패망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변에 전파하였다. 특히 1944년에는 일본인 교수 등에게 “미국이 일본보다 과학이 진보해 있고, 물자도 풍부하여 결국에는 일본이 전쟁에서 질 것이다” 라는 내용의 발언을 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1945년 3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육·해군형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에는 남조선과도정부 공보부 여론국 교육과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민주주의’ 강좌를 라디오에서 방송하였다. 1947년 7월에는 『민주주의원론』(전 3권)을 발표하고 정치학자로도 활동하였다. 6.25전쟁 중인 1950년 8월 납북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황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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