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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金鍾

黃鍾

1871. 1. 20 ~ 1951.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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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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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義城)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의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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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의성군 점곡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1년 1월 20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점곡면(點谷面) 윤암동(尹岩洞)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점곡면 사촌동(沙村洞)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 등에서 거행된 만세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의성군에서는 3월 12~13일 비안면(比安面)·3월 15일 안평면(安平面) 대사동(大司洞)에서 각각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점곡면 사촌동에 거주하는 기독교인 김태호(金台鎬)·김학배(金鶴培) 등은 송내동(松內洞) 교회 조사 권수백(權秀佰)과의 연락을 통해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였다. 또한 김태호 등은 의성군에서 먼저 일어난 만세운동의 주도자들과 연락하며 점곡면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리고 사촌동·송내동·서변동(西邊洞)·윤암동에서 참여자를 규합하면서 태극기를 다수 제작하였다. 3월 18일 저녁 9시경 김태호 등은 사촌동 앞 도로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경종을 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한 시위대는 점곡경찰관주재소로 이동해 만세시위를 이어갔고, 일부 사람들은 서변동시장과 송내동 일대를 행진하면서 늦은 밤까지 만세를 불렀다. 다음날인 3월 19일 점곡면의 만세시위는 더욱 확대되었다. 오전 9시경 사촌동 거리에 모인 200여 명은 김태호 등의 지휘에 따라 독립만세를 외친 후, 장대에 큰 태극기를 달고 점곡경찰관주재소로 이동하였다. 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거행하던 시위대는 일제 경찰의 저지로 일시 해산하였다. 오후 5시경 점곡면 평암동(平岩洞)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남오대(南梧大)로부터 “한국 독립 시위운동을 할 것이니 주민을 소집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에 남승순(南勝淳)·남규우(南圭佑) 등과 함께 마을주민 20여 명을 모집한 후, 사촌동 방면으로 행진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시위대와 함께 전날과 같이 만세시위를 밤늦게까지 전개하였다. 오후 9시 경에는 시위대와 함께 타종을 신호로 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재개하였다. 이때 사촌동·송내동·서변동·동변동·윤암동 등에서 참여한 주민 약 500명과 함께 사촌동 앞 도로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주재소를 포위하고 만세를 외쳤고, 시위대의 일부는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다음날 새벽 1시까지 시위대와 함께 만세시위를 지속하다가 주재소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제 경찰의 무차별적인 총격을 받고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3월 20일 만세시위 주도자로 지목되어 20여 명과 함께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이 소식을 들은 점곡면 주민들이 격분하여 같은 날 오후 10시경 재차 만세시위를 펼쳤으나, 일제 군경의 무차별적인 탄압으로 결국 해산당하였다.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 의성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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