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63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석우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2009)
관련 사건
- · 후기의병(조석우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9) 전라북도 무주군(茂朱郡) 삼곡면(三谷面) 촌이보(村二寶)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09년 당시 47세이므로 1863년생으로 추정된다. 1909년 조석우(趙錫祐)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 1907년 일제는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을 체결한 뒤 대한제국의 군대까지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어서 해산 군인 상당수가 의병부대에 합류하면서 강원도·경기도·충청북도·경상북도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이 활발해졌다. 조석우는 1909년 8월 23일 충북 영동군(永同郡) 양내면(陽內面)에 있는 영국사(寧國寺)에서 장군선(張君先)·조덕장(趙德章)·이기덕(李起德)·임재덕(林在德)·김명식(金明埴)·방치경(方致京) 등과 만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조석우가 스스로 삼남대장(三南大將)을 칭하며 총대장이 되었고, 장군선·조덕장·권덕원(權德元)을 부장으로 임명하였다. 동시에 한국이 이전과 같이 완전한 독립국이 되려면 일본인과 일제를 따르는 한국인을 처단하고, 철도정차장을 파괴해야 한다는 취지의 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각지에 격문을 보내거나 휘하에 격문을 보내서 병사를 모집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만남에 참여한 후 조석우 의병부대에서 함께 활동하였다. 1909년 8월 24일 조석우의 지휘 아래 20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곤봉으로 무장을 하고 양내면 누교리(樓橋里)로 가서 의병활동을 위한 군자금을 모으고 면민들에게 의병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의병활동을 위한 준비를 하던 과정에서 조석우와 지도부를 포함한 13명은 체포되었고, 다른 7명도 도주하면서 거사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때 조석우와 함께 누교리에서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09년 9월 23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이른바 내란죄로 유(流) 2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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