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養玉
崔養玉1893. 12. 25 ~ 1983. 6. 1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부한청년단
- · 공명단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893년 12월 25일 강원도 원주군(原州郡) 소초면(所草面) 둔둔리(屯屯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권인옥(權仁玉)·최인옥(崔仁玉)·최추강(崔秋崗)이다. 강원도 횡성의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후 부한청년단(扶韓靑年團)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중국에서 공명단을 조직하여 국내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다. 1917년 원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에서 수학하던 중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동지를 규합한 다음 천도교인들과 합세하여 3월 11일 횡성읍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20년 7월 서울 소격동(昭格洞) 신덕영(申德永)의 집에서 신덕영·노형규(盧衡奎) 등과 부한청년단을 조직하였다. 농림주식회사(農林株式會社) 주식 모집원으로 분장하고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담양군(潭陽郡)·곡성군(谷城郡) 등지에서 권총을 소지한 채 임시정부 출장원으로서 독립운동군자금 모집에 나섰으며, 이를 모아 중국 상하이의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하였다. 이렇게 활발히 활동하다가 같은 해 11월 5일 광주로 가던 도중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1년 5월 3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공갈죄, 가택 침입죄, 강도죄 등으로 징역 7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12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가 취소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6년 풀려난 후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기도하여 만주로 건너갔다가 중국 산시성(山西省) 태원부(太原府)에서 안창남(安昌男)·김정련(金正連) 등과 함께 독립운동단체인 공명단(共鳴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선임되었다. 단원들과 더불어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북만주에 비행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필요한 자금 모집과 공명단 지부를 서울에 설치하기 위해 1929년 4월 김정련·이선구(李善九) 등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1929년 4월 20일 동지들과 서울 교외 망우리(忘憂里)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서울에서 춘천(春川)으로 가는 우편국의 우편물 수송차량을 권총으로 습격하여 자금을 확보한 이후 강원도로 도피하였다. 일제 경찰에 행적이 발각되어 일제 경찰과 일본군 제19사단을 상대로 양주(楊州) 천마산(天麻山)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탄환이 떨어져 동지들은 경기도 경찰부에 붙잡히게 되었고, 다음날인 21일 서울 체부동(體府洞)에서 종로경찰서 경찰에게 붙잡혔다. 당시 ‘공명단 사건’은 독립운동의 대담한 방식으로 세간과 언론에 대서특필되어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29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과 우편법 위반, 강도죄 등으로 징역 10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이후 1939년 12월 14일 만기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김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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