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鳳仁
韓鳳仁1898. 11. 21 ~ 1968. 1. 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의열단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경북 의열단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98년 11월 21일 경상남도 밀양군(密陽郡) 밀양면(密陽面) 가곡동(駕谷洞)에서 아버지 한춘서(韓春瑞)와 어머니 김해옥(金海玉)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이명은 한일근(韓一根)이며,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서원탁남(西原卓南)을 썼다. 형 한봉근(韓鳳根)은 의열단(義烈團) 간부로 활약하였고, 아우 한봉삼(韓鳳三)도 독립운동가이다. 1909년 밀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3년 졸업하고, 밀양농잠학교를 거쳐 부산상업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17년 숙부 한춘옥(韓春玉)이 경영하는 밀양역 앞의 운송·잡화점에서 근무하였다. 그해 여름 중국 톈진(天津)의 덕화학당(德華學堂)에 재학 중이면서 방학을 맞아 귀향해 있던 친우 김원봉(金元鳳)과 함께 중국으로 갔다. 펑톈(奉天)에서 김원봉과 헤어진 후, 삼광상회(三光商會)를 경영하며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고종사촌 구영필(具榮佖)을 찾아가 점포 일을 거들었다. 1918년 10월 퉁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제2기생으로 입학하여 다녔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자들의 집결지인 지린(吉林)으로 갔다. 거기서 재회한 김원봉의 요청으로 5월에 귀국하여, 경북 칠곡군(漆谷郡) 지천면(枝川面) 신동(新洞)에 사는 이명건(李命鍵)을 찾아가 김원봉의 부탁을 전하고 수천 원을 출연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그 후 다시 출국하거나 지린으로 돌아가지 않고 밀양 본가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가업에 충실하였다. 그해 11월 10일 지린에서 항일투쟁 비밀결사로 의열단이 창립될 때 참여하지 못하였다. 1920년 가을에서 이듬해 봄 사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오카야마현(岡山縣)의 금광중학(金光中學)에 입학하여 1923년 수료하였다. 그해 귀국하여 11월 진효순(陳孝淳)과 결혼하였다. 1924년 1월 1일 밀양소년단(密陽少年團) 주최로 열린 신년벽두 강연회에서 「결심(決心)」이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1925년 11월 6일 의열단 간부 이종암(李鍾岩)이 경북경찰부 일제 경찰에 의해 붙잡히면서 관련자 10여 명도 모두 붙잡혀갔다. 이른바 ‘경북 의열단사건’이다. 이때 함께 붙잡혀 경북경찰부로 압송되었다. 취조 결과, 이종암에게로 오는 서신을 대신 받아서 배중세(裵重世)에게 보내면 배중세가 그것을 이종암에게 전달하는 식의 연락중계 임무를 수행했음이 드러났다. 1926년 3월과 6월 두 번의 구류갱신결정 끝에 그해 10월 19일 보석허가로 풀려났다. 그해 11월 2일 대구지방법원 예심종결에서 유죄 결정이 내려져 기소되었다. 같은 해 1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미결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1927년 12월 11일 신간회(新幹會) 밀양지회 창립준비위원회 선전부 위원이 되었으며, 12월 19일의 창립대회 개최를 홍보하였다. 1929년 5월 8일 밀양지회에서 경북한재구제회(慶北旱災救濟會)를 조직키로 결의하자, 준비위원이 되어 기금 마련을 위한 음악회 개최에 조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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