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린튼
1891. 2. 8 ~ 1960. 10. 1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0)
관련 사건
- · 1919년 만세운동
- · 신사참배 거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0) 1891년 2월 8일 미국 조지아(Georgia) 주 토모스빌(Thomasville) 근교에서 농부이던 아버지 와이츠 린턴(Wyche Waddell Linton)과 감리교인이던 어머니 아만다 올더만(Amanda Ponder Alderman)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0년 부모가 의견 차이로 별거하게 되어 어머니를 따라 살며 감리교회에서 성장하고 세례를 받았다. 1907년 고향을 떠나 애틀란타(Atlanta) 조지아 공대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하던 중 1908년 5월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09년부터 장로교회 장로였던 헐(M. M. Hull) 박사의 집에 기숙하면서 대학공부를 계속하던 중 1911년 한국 선교사로 사역하다가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선교사 충원을 위해 순회강연을 하던 프레스톤(John Fairman Preston, 변요한)을 만나 한국 선교를 지원하였다. 1912년 4월 9일 미국 남장로회 해외선교부에서 선교사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6월 조지아공대 전기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해 8월 23일 프레스톤 선교사와 함께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항을 떠나 9월 20일 목포(木浦)항에 도착하였다.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부 군산(群山)선교지부에 배속되어 1913년 고성모(高聖模)로부터 한국어를 배우고, 1914년부터 군산 영명학교(永明學校)에서 성경과 영어 과목을 가르쳤다. 1917년 영명학교 교장을 맡고 있던 불(William Ford Bull, 부위렴) 선교사가 부인의 병 때문에 귀국하자 그 대신 교장 직을 맡았다. 1919년 3월 5일 교장으로 있던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주도로 군산지역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는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옥구(沃溝)로 내려온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다니던 김병수(金炳洙)와 영명학교 교사 고석주(高錫柱)가 3월 6일 군산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하려고 이두열(李斗悅)·김수영(金洙榮)·박연세(朴淵世) 등 영명학교 교사와 양기철(梁基哲)·전세종(田世鍾)·송기옥(宋基玉) 등 영명학교 학생들과 함께 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어 준비하다가 일제 경찰에 사전에 발각되자 거사 일을 하루 앞당겨 일으킨 것이다. 이 시위로 교사와 학생들이 다수 검거되어 학교는 부득이 휴교하게 되었고, 그해 5월 4일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미국에 돌아가서 자신이 목격한 한국 상황을 알리기 위하여 그해 8월 노스캐롤라이나 주 몬트리트에서 열리는 해외선교사대회에 참석하였다. 또 그무렵 애틀란타에서 열린 격년제 미국 남부지역 평신도대회에도 참석하여 만세운동의 비폭력 저항을 비롯한 한국의 실정을 알리는 연설을 하였다. 이 연설 내용은 애틀란타 지역 신문인 『애틀란타 저널(The Atlanta Journal)』에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한 애틀랜타인의 증언(Atlantian tells how Koreans are seeking liberty)’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여기서 “(1919년) 3월 1일, 인구 30만 명의 수도 서울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 행진하였다. 폭력과 무질서는커녕, 일본 정부가 군중을 해산하려고 할 때 저항조차 없었다. 그들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있었을 뿐이다. (중략) 잡혀온 한국인들로 감옥에 더 이상 자리가 없자, 군부는 기병대대를 보내 수백 명의 한국인들을 말발굽으로 짓밟았다. 하지만 여전히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일본은 더 강한 군사력을 투입했고, 수천 명의 항일운동가들은 폭력으로 저항하지 않고 총검에 쓰러져갔다.”고 하면서 동맹국가와 국제사회가 관심을 갖고 도울 것을 호소하였다. 컬럼비아 사범대학(Columbia Teacher’s College) 교육학 석사과정에 들어가 1921년 6월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고 졸업하였다. 그해 10월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와 영명학교 교장에 다시 취임하였다. 1922년 6월 10일 유진 벨(Eugene Bell, 배유지) 선교사의 딸인 샬롯(Charlotte Witherspoon Bell, 인사례)과 결혼하였다. 1926년 2월 전주선교지부로 전임하여 신흥학교(新興學校) 교장을 맡았다. 1928년 6월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가 1930년 컬럼비아 신학교(Columbia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토머스빌 교회에서 특수 목회를 위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같은 해 6월 29일 전주로 돌아와 9월 19일 신흥학교 교장을 다시 맡았다. 1935년 4월 신흥학교를 조선총독부 지정학교로 인가받았다. 이 무렵 조선총독부는 기독교 학교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1935년 11월 평양 기독교계 학교장들의 신사참배 거부 사건이 일어나 이듬해 1월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 교장을 겸임하던 매큔(G. S. McCune)의 교장 직을 박탈하였다. 1936년 10월 전북신사 추계 대제 때도 도 당국에서 학생들의 참배를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였다. 다음 달인 11월 전주에서 열린 남장로회 선교사 연례회의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한다면 교육 사업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다는 결의를 하였다. 그리고 미국 선교본부에 연락하여 해외선교부 실행위원회 총무 풀턴(C. D. Fulton)을 급히 내한하게 하여 이 문제에 대한 결정을 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풀턴은 일본에서 출생한 2세 선교사 출신으로 신도와 일본 문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풀턴은 1937년 2월 내한하여 전주에서 남장로회 선교사 임시총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토론하고, “학생들과 교직원들에게 신사참배를 시키기보다는 차라리 학교를 폐쇄”할 것을 허락하는 “한국 학교에 대한 정책”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성명서는 모두 13개항으로 되어 있는데 그 핵심적인 내용은 “기독교 교리를 수정하지 않고는 우리 교육사업을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은 최근의 사태 발전을 고려하여, 이에 우리는 마지못해 우리 한국선교부에 적절한 절차로 우리 학교를 폐쇄할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지시한다”는 것이었다. 1937년 6월 27일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 교장도 겸임하였다. 풀턴 성명이 발표된 지 5개월 후인 7월 7일에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기독교계 학교의 교사와 학생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가 본격화되자 선교부 방침에 따라 1937년 9월 8일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를 자진 폐교하였다. 1938년 1월 22일 미국 선교본부에 학교 폐교에 대한 보고서를 내고, 같은 해 6월 1일 제3차 안식년으로 귀국하는 길에 팔레스타인과 유럽을 여행하였다. 1939년 다시 한국에 돌아와 1940년 1월 일제의 학정을 선교부에 보고하였다. 미일관계가 악화되어 서울주재 미국영사관에서 주한 미국인들의 철수를 권고하자 선교부 방침에 따라 같은 해 11월 14일 한국에서 철수하였다. 이듬해인 1941년 9월 30일 미국 남장로회 해외선교부 부총무를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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