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鎔吉
鄭鎔吉1887. 2. 17 ~ 1938. 3. 1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진주군 진주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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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7년 2월 17일 경상남도 진주군(晋州郡) 진주면(晉州面) 대안동(大安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8일 진주군 진주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진주군 만세운동은 3월 18일 진주면 만세시위가 최초이다. 사전 계획부터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고종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김재화(金在華) 등이 상경하여 서울 만세운동을 경험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3월 11일 돌아왔다. 뜻을 함께하는 지역 인사들이 모여서 거사를 계획했는데, 적극적으로 참석하였다. 함께 거사 준비를 한 인물은 강달영(姜達永)·박진환(朴進煥)·이강우(李康雨)·권채근(權采根)·강상호(姜相鎬) 등이었다. 거사일은 장날인 3월 18일로 결정하였다. 만세시위에 사용할 독립선언서와 교유문(敎喩文) 작성 및 인쇄, 태극기 제작 등의 역할 분담을 하였다. 계획이 누설되지 않도록 진주 여러 곳에서 주도자 2~3명씩 분산, 회합하여 거사 준비 점검 및 거사 당일 역할을 나누었다. 독립선언서와 교유문 전부를 거사 전날 집에 보관하고 있다가 당일 주도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역할을 하였다. 본인도 군중에게 배포할 독립선언서와 교유문을 가지고 진주시장으로 가지고 갔다. 3월 18일 만세시위는 읍내 시장, 매립지, 법원 지청 앞, 공원 등에서 동시에 시작하였다. 주도층이 각각 나누어 시위를 이끌고 이후에 진주면 중심부에서 합치는 방식이었다. 김재화·박진환과 함께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로 하였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오후 1시경부터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과 태극기를 본뜬 깃발을 시장 중앙에 세우고, 모인 군중을 향하여 만세시위 참가를 독려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독립선언서와 교유문을 군중에게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시장에 모인 군중이 ‘독립만세’를 따라 부르며 호응하였고, 순식간에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군중을 이끌고 시장을 행진하였다. 그리고 진주면 중심가로 나아갔다. 매립지, 법원 지청 앞, 공원에서 시작된 시위 군중과 합쳐지면서 시위대는 일제 경찰 추산 4,000여 명으로 늘었다. 만세시위는 진주면 중심가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밤늦게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만세시위의 양상이 심상치 않자 일제 군경들이 강제 해산을 위한 진압을 시작하였다. 진주경찰서 경찰들과 진주파견대 일본군들이 총검을 휴대하고 가세하였다. 진주소방대까지 합세하여 폭력적인 강제 진압에 나섰다. 이때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나, 일제 군경에 붙잡혔다. 이후 기소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해 9월 6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1920년 6월 6일 대구감옥에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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