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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學壽

鄭學壽

1873. 12. 24 ~ 1930.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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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鄭學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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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盈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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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10)

관련 사건

  • · 1919년 영덕군 창수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0) 1873년 12월 24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신리동(新里洞)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영덕군 창수면 창수동(蒼水洞)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영덕군 창수면에서는 3월 18일 영해면(寧海面) 성내동(城內洞) 시장에서 거행된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이어서 다음날 창수동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19일 창수동 구장 이수각(李壽珏)과 신기동(新基洞) 구장 이현설(李鉉卨) 등은 먼저 영해면의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시위대를 조직하였다. 특히 신기동에서는 당시 도로공사로 인한 토지 강제수용 문제 등으로 일제 통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기 때문에 만세시위에 참여하고자 하는 주민들이 많았다. 하지만 영해면의 만세운동이 이미 전날 시행되었고 영해면으로 가서 합류하는 것보다는 창수면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참여자들이 협의하여 창수동의 창수경찰관주재소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때 창수면 만세시위의 취지에 적극 찬성하며 동참하였다. 3월 19일 오후 4시경 창수면 주재소 앞에 모인 400여 명과 함께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한 이수각·이현설 등의 지휘에 따라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일제 경찰들이 전날 영해면·병곡면(炳谷面)의 만세시위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하고 있었지만, 400명이 넘는 시위대의 공격을 막지는 못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해산을 요구하는 일제 경찰들의 명령에 불응하고 더욱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주재소 건물과 기숙사 등의 창·벽·천장, 게시판, 문등, 변소, 목욕탕, 유치장의 기둥, 주재소 뜰의 수목, 내부의 서류와 기구, 비치된 총 3정과 대검 2개, 가구, 의류, 식기 등을 모두 파괴되었다. 오후 7시경 만세시위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판단하고 사람들과 함께 귀가하였다. 하지만 이 일로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건조물손괴, 공문서훼기, 기물 손괴,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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