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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化順

鄭化順

1871. 5. 14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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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鄭化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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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沃川)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옥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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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0)

관련 사건

  • · 1919년 공주군 정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0) 1871년 5월 14일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남면(南面) 세산리(細山里)에서 태어났다. 이후 충남 공주군(公州郡) 정안면(正安面) 석송리(石松里)로 이주하였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1일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廣亭里)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정안면의 만세시위는 석송리(石宋里)에서 존경받는 유림인 이기한(李綺漢)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이기한은 3월 1일 이후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그 취지에 찬동하여 이병억(李秉億)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리고 이기한은 4월 1일 이병억과 함께 석송리 주민 20~30명을 모아놓고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며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크게 공감한 이동엽(李東葉)·이동안(李東案)·정재철(鄭在喆)·장기현(張基鉉) 등을 포함한 수십 명의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기한의 주도로 석송리 주민들은 만세시위 대열을 갖추고 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내촌리(內村里)를 지나 면사무소가 있는 광정리(廣亭里)까지 행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를 목격한 인근 주민과 식수작업에 동원된 사람들이 시위 대열에 동참하면서 광정리에 도착할 무렵 시위대는 3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일본인 거주지와 정미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이기한의 지휘에 따라 광정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해 파괴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인지한 공주경찰서는 순사 기하라 신지로(木原新次郞), 순사보 이근남(李近南), 헌병군조(憲兵軍曹) 나카세이 미키치(中聖美吉) 이하 병졸 5명 등을 광정경찰관주재소로 급파하였다. 하지만 이미 만세시위를 끝내고 석송리로 돌아온 이동안·이동엽·노규현(盧奎鉉)·정재철·김정쇠(金正釗)·김정길(金鼎吉)·장기현 등과 함께 김원일(金元日)이 경영하는 주막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오후 4시경 만세시위 진압을 위해 광정리로 출동한 일제 경찰의 차량이 석송리 주막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함께 휴식하고 있던 사람들과 함께 차량을 가로막고 일제 군경과 대치하였다. 헌병군조 나카세이와 순사 기하라 등이 소총에 착검한 상태로 하차하여 이동엽을 차량 진행 방해의 주도자로 지목하고 체포하려고 하였다. 이에 항거하며 노규현·장기현·정재철 등과 함께 기하라 순사를 떠밀고, 이동엽의 포승줄을 풀어주었다. 이어서 노규현·장기현·정재철·문백룡·김정쇠 등과 함께 일제 경찰을 밀치며 이동엽에 대한 체포를 방해하자, 나머지 일제 군경들이 총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병림(李秉霖)이 총에 맞아 사망하였고, 결국 10여 명과 함께 붙잡혀 공주로 압송되었다. 이후 일제 경찰을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9월 2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며 항소하였고, 같은 해 11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일부가 취소되면서 다시 징역 8월(미결구류일수 중 10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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