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미상 ~ 192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관련 사건
- · 청산리전투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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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5) 함경북도 부령(富寧) 출신이다. 자료의 한계로 정확한 출생연도와 집안 내력, 성장 과정 등은 알 수 없다. 1919년경 북간도로 망명하여 정면수(鄭冕洙)와 함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졸업하였다.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는 1920년 3월 왕칭현(汪淸縣) 십리평(十里坪)에 세운 군사간부 양성학교로 김좌진(金佐鎭)이 소장이었다. 생도는 주로 대종교 청년 신도와 왕칭현 덕원리에 있는 명동학교 학생들이었다. 사관연성소는 1920년 9월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여 졸업생 289명을 배출하였다. 졸업생 대다수는 교성대(敎成隊)로 편성되어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백두산 일대로 이동하던 중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청산리전투에 소대장으로 참가하여 승전하였다. 1920년 말 일제의 계속된 추격을 피하여 러시아 연해주의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1921년 일어난 자유시참변에 휘말리고 말았다. 자유시참변은 북간도와 연해주의 반일독립부대를 망라하는 대규모 통합부대 편성과정에서 발생한 유혈 내분이었다. 1921년 6월 28일과 29일에 통합부대의 지휘권을 둘러싸고 고려혁명군과 대한의용군 사이에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다. 그 결과 최소 100명에서 최대 500명에 달하는 독립군 병사들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특히 대한의용군에 대한 고려혁명군의 공격으로 시작된 이 참변으로 인해 대한의용군은 무장이 해제되었고, 그 소속군인들은 명령불복종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때 대한의용군 측에 가담하였다가 붙잡혔다. 무장해제 당시 대한의용군은 대략 사망 600여 명, 포로 917명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포로들은 ‘죄질’에 따라 3등급으로 구분되었다. 그 결과 본인 의사와 달리 대한의용군 사령부의 강압에 못 이겨 그 속에 잔류하였다고 규정된 ‘총군부군대’와 기타 군인 364명은 군정의회군대에 편입되었다. 그보다 ‘죄질’이 무겁다고 간주된 428명은 극동공화국 제2군단 산하의 ‘죄수부대’로 편성되어 아무르주의 깊은 산림지대 우스문으로 이송되어 강제노동에 종사하였다. ‘죄질’이 가장 무겁다고 간주된 72명의 ‘중대범죄자’들은 이르쿠츠크로 압송되어 ‘임시고려군사혁명법원’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이르쿠츠크감옥에 투옥되었다. 이때 ‘중대범죄자’로 분류되어 이르쿠츠크감옥에 수감되었다. 수감 생활 도중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성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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