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光元
趙光元1897. 10. 21 ~ 1972. 10. 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한국독립당 하와이총지부
- · 대한민족통일촉성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9)
관련 사건
- · 사이판전투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9) 1897년 10월 21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길상면(吉祥面) 온수리(溫水里)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조 노아이다. 강화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인천상업학교에 입학하여 1919년 3월 7일 졸업하였다. 온수리에 성공회 강화성당이 있어 유년기부터 신자가 되었고, 청년기에는 평신도 지도자가 되었다. 보통학교 2학년 때 강화 내성 남문 밖으로 이사를 하여 남문 안쪽에 살던 조봉암(曺奉岩)과 인연을 맺었다. 1921년 4월 25일부터 서울 정동성당에서 열린 제3회 전도구연합회에서 ‘전도장려부’ 설치를 위한 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이후 트롤로프 주교의 명에 따라 미국 성공회 하와이 교구로 파송되었다. 공석이 된 전도사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본격적인 사제수업을 받기 위한 목적이었다. 1923년 11월 일본을 거쳐 12월 7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이후 미국 나쇼다 성공회신학대학에서 신학 수업을 받는 동시에 한인사회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6월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宋鎭禹), 연희전문학감 유억겸(兪億兼), 교육가 김종철(金鍾喆) 등이 하와이를 방문했을 때, 한길수(韓吉洙)와 함께 이들을 위한 특별연합예배를 주선하였다. 1926년 5월에는 일시 귀국하여 성공회 성당에 머물며 하와이의 상황을 소개하였으며, 특히 하와이 한인들이 경제적으로 발전하여 개인도 저금에 힘쓰고 있으며, 이승만(李承晩)이 양로원을 만들고자 수만 원의 자금을 모집하였고, 박용만(朴容萬)이 경제 방면으로 활동하고자 한다는 등의 사실을 소개하였다. 1928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 한국인 유지들에 의해 대한민족통일촉성회 준비위원회가 조직되면서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6월 3일에는 하와이교구장으로부터 정식으로 성직을 받았다. 8월에는 몇 해 동안 정간되었던 『영코리안』 복간을 위한 이사부 이사 중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한국어 교육에도 힘써 1929년 10월 성루가국어학교 교장으로 60여 명의 한인 학생에게 한국어 교육을 시켰다. 1930년 1월 13일 밤 유지 29명이 ‘민족주의에 기인하여 대한 독립운동을 촉진한다’고 표방하며, ‘임시정부로 힘을 모아주고 최후의 1인까지 분투한다’는 취지하에 한인의 정치기관을 세우고 독립운동을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봉대하자는 취지로 조직한 하와이 한인협회 발기인의 한 명으로 참여하였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하와이 한인사회는 이번 사건이 조선민족의 장래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하고, 10월 30일 하와이 교민단 명의로 미국 대통령 후버와 제네바 국제연맹회장에게 일제 침략에 항의하는 내용의 통고서를 보냈다. 이때 감리교 목사 자격으로, 교민단 총단장, 구제회장 등과 함께 서명하였다. 1940년 이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하와이총지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는데,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인 첩자를 색출하기 위한 한인자위단을 결성하는 한편, 독립자금의 모금에도 나섰다. 1944년 9월경에는 미국 해병대 종군신부로 사이판전투에 참전하여, 대일 선전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본군에 강제 징용된 한인을 구출하는 데도 힘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곽금선⋮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