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晩仁
趙晩仁1898. 12. 13 ~ 1961. 9. 1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8)
관련 사건
- · 1919년 안동군 예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8) 1898년 12월 13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도산면(陶山面) 원천리(遠川里)에서 태어났다. 이후 단천리(丹川里)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이명은 조석칠(趙錫七)이고, 일제의 강요에 의해 시로타 반진(城田晩仁)이라는 창씨명을 썼다. 1919년 3월 17일 안동군 예안면(禮安面)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예안면의 만세시위는 면장 신상면(申相冕)의 주도로 이시교(李時敎)·이중원(李中元)·이남호(李南鎬)·백남학(白南鶴)·이광호(李洸鎬) 등 면사무소 직원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다. 면장 신상면은 3월 11일 밤 9시경 이시교 등의 면사무소 직원들을 숙직실로 소집하여 “지금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으니 당지에서도 내일 장날 거사를 단행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의견을 구하였다. 이시교 등의 직원들은 만세시위를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찬성하지만, 거사일이 너무 촉박하다고 대답하였다. 논의를 통해 예안면의 만세시위 날을 예안장터 장날인 3월 17일로 결정하고, 구체적으로 추진하였다. 신상면과 이시교 등 직원들은 면사무소의 시설과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대량의 태극기를 제작했으며, 만세시위 계획을 인근 지역으로 연락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예안면사무소 직원들의 활동을 통해 만세운동 계획을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3월 17일 예안장터로 갔다. 장터에는 이미 만세시위를 연락받은 수천 명의 주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오후 3시 30분경, 이병린(李炳麟) 등 30여 명이 예안면사무소의 뒤편 선성산(宣城山) 위에 설치된 일본인들의 기념비를 넘어뜨린 후, 장터를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것을 신호로 장터에 분산되어 있던 3개의 시위단이 일제히 장터의 한복판으로 나와 품속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장터에 나와 있던 수천 명의 주민과 함께 곧바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장터에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곧바로 일제 경찰들이 출동하여 시위를 주도한 면사무소 직원 등 20여 명을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이에 격분한 이동봉(李東鳳)이 시위대의 선두로 뛰어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보고 또다시 대한독립만세를 큰소리로 외치며, 이동봉의 지휘에 따라 주재소로 달려가 그곳을 포위하고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일제 경찰이 무력을 행사하며 제지하자, 투석으로 맞서 주재소 건물을 파괴하고 일제 경찰 3명을 포로로 잡아 이들의 무장을 해제시킨 후, 시위 대열의 앞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예안면의 격렬한 만세시위에 일제는 안동 주둔 일본군수비대를 파견하여 공포탄을 쏘아대며 시위대를 해산시켰고, 참여자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 색출 작업을 전개하였다. 이때 일제 군경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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