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三俊
趙三俊1895. 10. 13 ~ 1976. 2. 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창녕 결사단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895년 10월 13일 창녕군(昌寧郡) 영산면(靈山面) 성내리(城內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3일 창녕군 영산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민족대표 33인이었던 감리교 목사 신석구(申錫九)와 고성 출신의 천도교인 황태익(黃泰益)은 창녕 지역 인사들에게 만세시위를 준비하도록 독려하였다. 이에 창녕군 내 천도교도인 장진수(張振秀)는 보성학교 출신의 구중회(具中會)·김추은(金秋銀)과 함께 3월 13일 창녕군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구중회 등은 만세시위에 사용할 목적으로 ‘대한독립만세’라고 쓰여진 대형 깃발을 제작함과 동시에 태극기,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 그리고 창녕군 내 지역민들에게 만세시위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3월 12일 밤에 구중회·김추은·남경명(南景明)·장진수는 구중회의 집에서 천교도인으로 구성된 23인의 결사단을 조직하였다. 그 결사단의 일원으로 합류하였다. 3월 13일 오후 2시경에 결사단의 일원으로 영산면의 남산봉으로 가서 조선의 완전한 독립주권국 쟁취를 선언한 ‘결사단원 맹세서’에 서명하였다. 결사단은 일제 군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목적에서 자신들의 조직을 개춘회(開春會)라고 밝혔지만, 12일 구중회의 집에서 비밀리에 회합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한 창녕경찰서장은 남산봉에 모인 23명 결사대에 대한 체포를 지시하였다. 이 명령에 따라 영산주재소 경찰은 남지(南旨)주재소의 경찰의 힘을 빌려 남산봉 밑 만년교(萬年橋) 부근에 대기하면서 주동 인물들의 동정을 살피다가 주동 인물들이 하산할 때 공격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결사단원들은 일제 경찰의 총칼을 미나리 밭에 던지거나 일제 경찰들을 잡아서 미나리 강에 처넣기도 하면서 격렬히 저항하였다. 결사대와 일제 경찰의 충돌이 있자, 많은 군중이 그 현장으로 모였다. 이에 결사단원들과 함께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동시에 1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창가(唱歌) (혹은 소년행진가)를 부르면서 영산읍내로 들어갔다. 이때 보통학교 졸업자들과 노동자 등이 영산읍내에서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시위대 일부는 일본인 상점을 공격했으며, 일부는 주재소를 포위하였다. 이후 오후 6시가 되자 구중회의 마무리 연설을 끝으로 시위대는 만세시위를 멈추고 자진 해산하였다. 창녕경찰서는 영산면으로 추가 병력을 급파하였다. 급파된 일제 군경은 시위주도자 구중회·김추은·장진수를 창녕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결사대원들과 함께 창녕경찰서로 가서 연행된 동지들을 구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저녁 8시경 300여 명에 달하는 시위대를 이끌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남산봉에서 창녕읍으로 향하였다. 계성교 부근에서 일제 군경의 무력 진압에 막혀서 인근 산마루로 후퇴하기도 하였으나, 이내 투석전을 전개함으로써 일제 군경의 후퇴를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이후 시위대와 함께 창녕경찰서로 가서 연행된 인사들을 구출하고자 하였으나, 일제 군경의 무력진압으로 목적한 바를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후 일제 군경에 의해서 영산읍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유로 붙잡혔다. 1919년 5월 1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인 징역 8월이 확정되면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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