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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聖賢

趙聖賢

1875. 2. 17 ~ 1932.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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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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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해주(海州)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해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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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가좌면 취야리 장터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5년 2월 17일 황해도 해주군(海州郡) 가좌면(茄佐面) 취야리(翠野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3일 가좌면 취야리 장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해주군의 만세운동은 3월 1일 기독교 목사 오현경(吳玄卿)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김명신(金明信)으로부터 독립선언서 300장을 입수한 오현경은 3월 1일 오후 2시경 남본정에 위치한 기독교 예배당에서 독립선언서 낭독 및 대한독립만세 삼창을 거행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해주군 내에서는 만세운동이 계속되었다. 3월 9일 해주 읍내의 기독교 청년들과 공립학교·사립학교 생도들의 남욱정(南旭町) 만세시위 시도, 석동면(席洞面) 서원리(書阮里)의 만세시위, 3월 10일 옹진군 천도교인들의 해주면 만세시위, 3월 10일 서변면(西邊面) 만세시위, 3월 12일 추화면(秋花面) 약현리(藥峴里) 청단(靑丹) 장터 만세시위, 3월 17일 청룡면(靑龍面) 영양리(迎陽里) 만세시위 등이 잇달아 일어났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가좌면 취야리의 천도교인 기독교인은 4월 3일 취야 장터 장날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취야 장터는 옹진군과 장연군에서 해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관계로 많은 사람들이 장터에 모이기 때문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4월 3일 오후 2시경 가좌면 취야리 취야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600여 명의 시위대는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대의 행렬을 보고, 그에 동조해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최봉조(崔奉祚)·이진각(李鎭珏)·서장관(徐壯寬)·이용선(李龍善)·신홍윤(申弘允)·김치서(金致瑞)·길선호(吉先浩) 등과 함께 시위대를 이끌면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염준호(廉俊鎬)는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후 시위대와 함께 취야경찰관주재소로 이동하였다. 시위대 일부가 주재소 안으로 진입하자 주재소장과 경찰들은 뒷문을 통해서 달아났다.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 유리창, 전화기, 집기, 유치장 일부와 가좌면사무소 집기 일부를 파괴하였다. 오후 3시경 증원 병력이 도착하면서 일제 군경은 실탄을 발포하면서 만세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였다. 이로 인해 8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시위대는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 군경은 현장에서 40여 명에 달하는 시위 참여자들을 체포하였고, 만세시위 종료 이후에도 관련자에 대한 색출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총 81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붙잡혔는데, 이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주경찰서에 붙잡혔다. 해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며 항소하였지만, 1919년 9월 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만세시위에 참여한 행위로 3년을 선고한 사실이 부당하다면서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10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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