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修仁
趙修仁1881. 2. 2 ~ 1943. 6.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안동군 예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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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1년 2월 2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 부포동(浮浦洞)에서 태어났다. 이후 임북면(臨北面) 정산동(鼎山洞)으로 이주하였다. 본관은 횡성(橫城)이다. 체격이 장대하고 든든해서 쉽게 눈에 띄었다고 한다. 1919년 3월 17일 안동군 예안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안동군에서는 3월 13일 이상동(李相東)이 1인 만세시위를 시작한 이후 여러 계층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때 마을에서 만세운동을 하기로 계획하고, 김진휘(金振輝)·조병건(趙秉健)·이원영(李源永) 등 안동군의 유림들을 모아 만세시위를 논의하였다. 이들과 비밀리에 만나 3월 17일 예안면 장터에서 거사를 실행하기로 결의한 후, 태극기를 제작하고 만세운동에 참여할 사람들을 규합하는 등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한편 같은 시기 예안면장 신상면(申相冕)은 이광호(李洸鎬)·이용호(李用鎬)·이시교(李時敎) 등과 모여 대규모 만세운동을 준비하였으며, 예안 만촌교회(晩村敎會)의 기독교인들도 각각 같은 날에 만세운동을 펼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3월 17일 태극기를 숨기고 예안면 읍내 장터로 이동한 후 주도자들과 함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때를 기다렸다. 오후 3시 30분경 갑자기 예안면사무소 뒤편 선성산(宣城山)에서 만세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장터에서도 100여 명이 장터 중앙으로 뛰어나오며 만세를 외치자 주도자들과 함께 사람들을 이끌고 나아갔다. 시위대와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장터 곳곳을 누볐다. 그러자 장터에 있던 장꾼과 주민들도 호응하면서 만세시위의 열기는 점점 더 높아져 갔다. 그러나 만세운동을 미리 탐지한 일제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해산을 명령하면서 장터에 있던 수비대를 동원하여 탄압하였다. 하지만 시위대와 함께 이를 거부하고 수비대를 뚫고 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또한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대를 향하여 학생과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사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에 시위가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일제 경찰이 무력으로 주도자 등 15명을 붙잡으면서 시위대와 함께 흩어지게 되었다. 이후 장터를 떠나지 않고 이맹호(李孟鎬)·이회림(李晦林) 등과 함께 후속대책을 논의하여, 구속자를 탈환하기로 결정하고 사람들을 모아 다시 한번 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오후 6시경 시위대를 선두에서 지휘하며 주재소로 나아갔다. 그리고 주재소 앞에서 시위대를 막는 수비병을 향하여 “왜 만세를 부른 사람들을 체포하는지 이유를 들려 달라”며 추궁하였고, 구속자 석방을 외치면서 주재소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시위대는 주재소 안에서 돌과 기왓장을 던지는 등 투석전을 전개하면서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시위가 갈수록 과격해지자 일제 군경은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일제 군경은 총검을 휘두르고 실탄을 발포하면서 강제로 시위대를 해산시켰고 주도자 25명을 현장에서 체포하였다. 이때 현장에서 붙잡힌 후 포박을 끊고 저항하다가 수비대 군인의 칼에 찔려 부상을 입었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다시 붙잡혔다. 이 일로 1919년 3월 31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반 소요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며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그해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0년 2년 6월로 감형되었고, 1921년 11월 28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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