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鏞九
趙鏞九1882. 12. 13 ~ 1936. 7. 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군북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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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2년 12월 13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군북면(郡北面) 유현리(柳峴里)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명집(明集)이다. ‘불칼’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는데, 의협심이 강하고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1919년 3월 20일 함안 지역 만세운동 중 가장 치열하였고 대규모였던 군북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20대 청년시절 일제의 을사늑약과 강제병합 과정을 보면서 항일의식을 갖게 되었고, 국권회복운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군북면 만세시위의 또 다른 주도자와 조용대(趙鏞大)와 한 살 터울의 사촌 형제였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조용대 역시 함안 지역에서 국권회복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조용대의 사랑채에 지역 인사들과 함께 군북면의 만세시위에 대해 논의하였다. 군북면 만세시위는 3월 19일 함안 읍내 만세시위와 계획 단계에서부터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함안 읍내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한 이희석(李喜錫)은 조용대의 사랑채에서 군북면의 주민 동원을 논의하기 위해 이 지역 인사들과 회합하였다. 이때 군북 지역 인사들은 함안 읍내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로 결정하고, 다음날인 3월 20일 군북면에서도 독자적으로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의하였다. 함께 계획을 주도한 사람들은 조상규(趙相奎)·조용효(趙鏞孝)·이재형(李在蘅)·조정래(趙正來)·조성규(趙聖奎)·조형규(趙炯奎) 등이었다. 3월 10일부터 군북면 만세시위에 대한 준비가 본격화되었다. 시위에 필요한 태극기 제작과 독립선언서 내용 축약과 등사, 군중 동원을 위한 각 지역별 연락, 일제 경찰과 밀정에 대한 감시 등 역할을 분담하였다. 거사 준비 장소는 백이산(伯夷山) 서산서당(西山書堂)과 원효암(元曉庵) 의상대(儀湘臺)였다. 당시 동지 규합을 위한 연락책, 태극기 제작, 독립선언서의 개작·축소 등 다양한 준비 작업에 참여하였다. 3월 19일 함안 읍내 만세시위로 인해 일제 군경의 감시가 심해졌다. 이에 군북면의 시위를 3월 20일 정오부터 시작하려던 계획을 변경해, 오전 9시부터 동촌리(東村里)에 위치한 사립 신창학교(新昌學校) 교정에서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만세시위는 군북경찰관주재소(郡北警察官駐在所)에 파견되어 있던 진해만 중포병대대 특무조장 다이마 기지로(泰間喜治郞) 이하 16명의 일본군에 의해 해산되었다. 오후 1시 군북 장터에 재집결하여 독립선언서 낭독과 함께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미 5,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군북면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시 일본군 포병대대와 일제 경찰의 진압이 재개되었다. 대규모의 시위대가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로 돌진하여 포위하고 투석전을 전개하며 적극적으로 만세시위를 진행하자, 일제 군경 역시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대의 기세가 꺾이지 않자, 결국 일본군 중포병대대가 실탄으로 조준사격을 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20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만세시위 주도자에 대한 일제 군경의 대대적인 검거 작전이 전개되면서 한 달 뒤인 4월 21일 집에서 붙잡혔다. 이 일로 같은 해 6월 27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 건조물 훼기 등으로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체포와 구금, 재판과 옥고를 겪는 과정에서 몸이 많이 상하였고, 수감 중에는 천연두까지 걸려 건강이 더 악화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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