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冠吉
崔冠吉1897. 2. 12 ~ 1962. 3. 2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2006)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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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06) 1897년 2월 12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양성면(陽城面) 산정리(山井)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최관길(崔寬吉)이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1일 안성군 원곡면(元谷面)·양성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4월 1일 저녁 이희봉(李熙鳳) 등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제안 받아 수락하였다. 이에 조병훈(趙炳薰)·손정봉(孫正奉)·고인재(高麟在)·오윤선(吳允善) 등과 함께 양성 읍내에 위치한 양성주재소 앞으로 가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밤 9시 50분경 만세시위를 마치고 자진해서 해산하려고 하였는데, 원곡면의 시위대가 양성면으로 넘어와서 만세시위를 함께 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양성면 시위대를 이끌고 원곡면 시위대와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그 과정에서 시위대는 2,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와 함께 양성주재소 진입을 시도하였다. 최은식(崔殷植)·김중식(金重植)·김순서(金順西)·정인규(鄭寅圭)·이규완(李圭完)·오윤선·오세학(吳世鶴)·고인재(高麟在)·이양섭(李陽燮) 등과 함께 양성주재소로 들어가서 주재소 기물을 파쇄하고 서류를 훼손시켰으며, 이후 양성면주재소를 전소시켰다. 이어서 시위대는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들을 파괴하였으며, 전화선을 절단하고 전주 3개를 넘어뜨려 양성면 일대 통신을 마비시키고자 하였다. 아울러 일본인 상인과 대금업자들이 사는 집을 공격하였으며, 일부를 방화하였다. 이후 시위대 20여 명과 함께 양성면사무소로 진입하여 장부 5~6책을 태워버렸다. 주재소 소속 일제 순사들이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하였지만, 시위대의 기세를 누를 수 없었다. 결국 일제 순사들은 탄환이 부족한 관계로 시위대 진압에 실패하였다. 4월 2일 새벽 4시 시위대는 원곡면사무소로 넘어가서 숙직실을 방화하였으며, 면사무소 집기와 서류를 불태웠다. 이어서 서남방으로 7km에 위치한 경부선 철도 침목을 파손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일제 수비대의 진압 소식을 듣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만세시위 관련자를 조사·색출하기 위해 4월 3일 일제는 병력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조사 과정에서 시위에 참여한 사실이 밝혀져 안성경찰서에 붙잡힌 뒤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죄, 소요죄 등으로 징역 7년(미결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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