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寬植
崔寬植1879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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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7) 황해도 해주군(海州郡) 월록면(月祿面) 삼현리(三峴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9년 당시 41세이므로 1879년생으로 추정된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8일 해주군 월록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말 무렵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3월 29일~4월 1일 해주면 일대에서는 크고 작은 만세시위가 계속해서 일어났다. 4월 1일 해주면 기생들은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제작한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4월 3일 가좌면(茄佐面) 취야리(翠野里) 취야장터에서는 천도교인과 개신교인이 주도한 만세시위가 있었으며, 4월 6일과 7일에는 장곡면(壯谷面)과 동운면(東雲面)에서 야간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4월 8일 월록면 삼현리(三峴里)에서 최미형(崔亹亨)·이민향(李敏香)·최재기(崔在棋)와 함께 동네 주민 수백 명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를 이끌고 군만리(群巒里) 경찰관주재소로 행진하여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월록면 만세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제 군경에게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해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상해죄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19년 8월 1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에 찬동하기에 양심에 의해서 만세시위에 참여했다“면서 무죄를 주장하며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해 10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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