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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文燮

崔文燮

1900. 10. 27 ~ 1941.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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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崔文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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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성(安城)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안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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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00년 10월 27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지문리(芝文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양성면(陽城面)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 등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은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안성군 원곡면 내가천리(內加川里)의 이덕순(李德順)·최은식(崔殷植), 칠곡리(七谷里)의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 외가천리(外加川里)의 이근수(李根洙)·이희룡(李熙龍) 등은 원곡면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거행하기 위해서 마을 주민들을 독려하였다. 이에 찬동한 많은 주민들이 3월 28일 원곡면 외가천리에 위치한 원곡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놀란 원곡면장은 시위대에게 해산을 종용하였고 일부 시위대는 자진해서 해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에 저항하며 만세시위를 지속하였다. 그 결과 원곡면 일대에서는 4월 2일까지 매일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4월 1일 같은 마을의 원지성(元智成)이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자 이에 찬동하였다. 원지성의 인솔 아래 강봉세(姜鳳世)·최덕인(崔德仁)·최병택(崔秉宅)·오만영(吳萬榮)·안철재(安喆載)·강봉돌(姜奉乭) 등과 함께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이때 원곡면사무소 앞으로 외가천리·내가천리·칠곡리의 주민들까지 집결하여 시위대의 규모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원곡면 시위대는 태극기와 횃불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밤 9시 50분 무렵 원곡면 시위대가 양성면의 성은고개를 넘어서 양성경찰관주재소에 도착하였다. 주재소 앞에 시위를 마치고 자진 해산을 준비하고 있던 양성면 시위대는 원곡면 시위대로부터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양성면 시위대가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시위대 규모는 2,000여 명까지 불어나게 되었다. 이어서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지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최관길(崔寬吉)·최은식·이회봉·김중식(金重植)·김순서(金順西)·정인규(鄭寅圭)·이규완(李圭完)·오윤선·오세학(吳世鶴)·고인재(高麟在)·이양섭(李陽燮) 등이 앞장서서 양성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주재소의 서류와 집기를 파손하였고, 시위대 일부가 횃불로 주재소를 방화하였다. 다른 쪽으로 진출한 시위대 일부는 양성면에 거주하는 일본인 상인과 대금업자 집을 공격하고 불태웠다. 양성주재소에서 투석전을 전개한 최창용·홍재의·홍경운 등과 함께 양성우편소로 이동하여 돌을 던졌다. 이운실(李雲實)을 비롯한 일부 시위대는 전신주 3개를 쓰러뜨리고, 전화기를 비롯한 각종 집기를 파손시킴으로써 양성면 일대의 통신을 두절시켰다. 또한 일부 참여자들은 안성면(安城面)에서 양성면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다리를 파손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를 통해서 외부와의 통신을 끊음으로써 일제 군경의 추가 투입과 진압을 지연시키고자 하였다. 4월 2일 새벽 4시 경에는 원곡면 시위대와 함께 원곡면사무소로 돌아와 독립만세를 외치며 면사무소를 공격하였다. 이때 면사무소 내부의 집기 일부를 파손하고, 숙직실을 방화하였다. 일제는 원곡면·양성면에서 격렬하게 전개된 만세시위 관련자를 조사·색출하기 위해 4월 3일 수색 병력을 양성면으로 파견하였다. 만세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붙잡혀 안성경찰서로 연행된 후 재판에 넘겨졌다. 이후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 등으로 징역 1년 3월(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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