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秉圭
崔秉圭1881. 10. 28 ~ 1931. 7.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의령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1년 10월 28일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용덕면(龍德面) 이목리(梨木里)에서 태어났다. 용덕면 면에서 서기를 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4~15일 의령군 읍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의령군 최초 만세시위는 면서기 동료였던 전용선(田溶璿)과 함께 주도적으로 참여한 3월 14일의 의령면 읍내 장날에 일어났다. 그 계기는 구여순(具汝淳)이 상경하여 서울의 만세운동을 경험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온 것이었다. 구여순은 군내에서 뜻을 같이하는 최정학(崔正學)·정용식(鄭容軾)·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 등을 만나서 거사 계획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거사일을 3월 14일로 결정하였다. 이후 만세시위를 위한 사전 준비를 시작하였다. 만세시위에 참가하는 군중에게 나눠줄 태극기 제작과 독립선언서 등사, 군중 동원 목적의 지역별 연락 등이 사전 준비의 주요 내용이었다. 용덕면 면서기라는 신분을 활용하여 전용선과 함께 독립선언서 등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등사는 면사무소 등사판과 원지를 이용하였다. 독립선언서를 일제 식민지배의 말단 행정조직인 면사무소에서 대량으로 등사할 수 있었던 것은 구여순과 최정학이 용덕면 면장 강제형(姜齊馨)을 찾아가 협조를 요청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강제형은 흔쾌히 승낙하였고 면서기인 그와 전용선에게 부탁하였다. 전용선과 함께 기꺼이 역할을 자임하였고, 독립선언서 등사를 은밀하게 진행하였다. 3월 14일 장날로 군중이 가장 많이 모이는 시간인 오후 2시경 군내 최초의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전용선과 함께 만세시위 참여를 위해 읍내로 나갔다. 의령향교 앞에서 시위 주도자인 구여순과 남인섭(南仁燮) 등이 차례로 연설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한 것이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연설은 일제 식민지배를 규탄하고, 독립의 당위성과 시위 참가를 독려하는 내용이었다. 시위대와 함께 적극적으로 호응하였고, 독립만세를 따라 불렀다. 시위대의 규모는 장터에 나온 주민들과 사전에 연락을 받고 참여한 군중이 합쳐지면서 삽시간에 3,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대의 선두에서 읍내 장터와 중심가를 행진하였으며, 시위대를 이끌고 일제 식민지 억압의 상징인 군청과 경찰관 주재소로 나아갔다. 만세시위는 다음날인 3월 15일에도 이어졌다. 전날과 동일하게 시위대의 선두에서 적극적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1,500여 명이 호응하여 격렬하게 시위를 거행하였다. 군내 중심부에서 연일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일제 군경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하고 시위대의 강제 해산과 주도자 색출을 감행하였다. 여기에는 마산의 일본군 포병대까지 급파되어 가세하였다. 체포 작전에 의해 군내 100명이 넘는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용선과 함께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7월 25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8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