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祥麟
崔祥1890. 5. 8 ~ 1975. 9. 2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통천군 임남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0년 5월 8일 경기도 개성군(開城郡) 고려동(高麗洞)에서 태어났다. 이후 강원도 통천군(通川郡) 임남면(臨南面) 장전리(長箭里)로 이주하였다. 기독교인으로 잡화상(雜貨商)을 운영하였다. 1919년 4월 2~3일 임남면 장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 주도하였다. 1919년 2월 말경 서울에서 우편으로 온 독립선언서를 받고 취지에 찬동한 후, 같은 마을에 사는 김두만(金斗滿)·박성준(朴成俊)·안흥식(安興植)·우낙영(禹洛榮) 등과 함께 자택에서 회합하였다. 그리고 3월 22일에는 간성군(杆城郡) 신북면(新北面)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 90장을 등사한 후, 군내 여러 마을에 배포하였다. 또한 3월 31일에는 구한국국기 250여 개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4월 1일 김두만·박성준·안흥식과 함께 마을에 거주하는 기독교인 수십 명의 집을 차례로 방문하여, 4월 2일 함께 만세를 부르자며 권유하였다. 4월 2일 거사 당일에는 김두만·박성준·안흥식·우낙영을 포함하여 목사 유시국(劉時國)과 함께 장전리에서 기독교인 20여 명을 이끌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마을 앞 다리까지 행진하였지만, 출동한 일제 경찰에게 선언서와 구한국국기 등을 압수당하고 해산하였다. 4월 3일 김두만·안흥식·우낙영·유시국 등과 더불어 다시 마을 사람 백여 명을 규합한 후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오후 4시경 장전경찰관주재소까지 이동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주재소 일제 경찰들이 만세시위를 제지시키며 주도자 10여 명을 체포하여 결국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5월 19일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며 항소하였고, 같은 해 7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었지만 다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면서 “자신의 행위가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正義)와 인도(人道)에 근거한 것으로 유죄판결은 부당하며 위법(違法)”이라고 주장하였지만, 그해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