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95. 3. 3 ~ 1935. 7. 2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옥천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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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5년 3월 3일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심천면(深川面) 마곡리(麻谷里)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며 생활하였다. 1919년 3월 27일 옥천군 이원장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원장터 만세시위는 육창주(陸昌柱)·육창문(陸昌文)·허상구(許相球)의 주도로 계획되었다. 육창주 등은 1919년 3월 초 고종의 장례식에 참례하는 과정에서 당시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취지에 적극적으로 공감하여 귀향한 뒤 고향에서의 만세운동을 결의하였다. 육창주 등은 평소 교류관계가 깊었던 친구, 또는 가족인 김용이(金龍伊)·허훈(許訓)·허상기(許相基) 등을 동지로 규합하여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김용이 등은 육창문의 자택에서 3월 15일 만세운동에 대한 회의를 개최하여 만세운동의 거사일을 이원장터의 장날인 3월 27일로 결정하고, 만세운동의 계획을 구체화하였다. 3월 27일 오후 1시경, 육창주 등은 흰 광목에 큰 글씨로 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장터로 나갔다. 육창주 등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장터에 나온 주민들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큰 목소리로 외치고, 장터에 나온 주민들을 향해 한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당시 옥천군의 이원장터까지 왔다가 장터의 한복판에서 태극기가 올라가고, 군중의 ‘대한독립만세’의 구호와 함께 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치자는 호소를 듣고, 이에 깊이 공감하였다. 이에 대한(大韓)의 신민으로서 만세운동의 대열에 참여해야겠다고 결의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시위대의 선두에서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 헌병대는 곧바로 출동하여 시위대를 가로막고, 육창주와 허상기를 헌병주재소로 강제 연행하고 태극기를 압수하였다. 그러나 시위대와 함께 해산하지 않고, 일제 헌병대의 무력 탄압에 자극을 받아 오히려 기세를 올렸다. 김용이와 허상구 등은 연행된 육창주와 허상기를 대신하여 분노한 시위대를 이끌고 헌병주재소 앞으로 가서 연행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일제 헌병대는 시위대를 향해 총기를 발포하여 현장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시위대와 함께 피신하여 상황을 주시하였다. 오후 3시경, 시위 참여 사망자의 유족이 시신을 주재소 앞으로 운구하고, 일제 경찰의 책임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1,000여 명과 함께 다시 시위대열을 형성하고 김용이·허상구 등의 지휘에 따라 헌병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일제 헌병대는 다시 총기를 발포하였다. 일제의 무력적인 진압에 사망자까지 발생하자 시위대의 다른 주민들과 함께 헌병주재소를 습격하기에 이르렀다. 김수원(金壽遠)·차기시(車奇矢) 등과 함께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리고, 담장을 파괴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잠시 김용이와 함께 일제 헌병대에 붙잡혀 유치장에 구금되었으나, 다른 주민들의 주재소 공격에 의해 다시 김용이와 함께 탈출하여 주재소 주변에 있던 말뚝을 뽑아 휘둘러 주재소를 파괴하고 일제 헌병들을 구타하였다. 격화된 만세시위 상황을 듣고 일제 당국은 지원 병력을 파견하여 무력진압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육창주·김용이 등과 함께 일제 헌병대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5월 5월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2년을 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즉각 항소하였으나,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7월 3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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