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새넌 맥큔
1873. 12. 15 ~ 1941. 12. 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105인 사건
- · 1919년 만세운동
- · 신사참배거부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73년 12월 15일 미국 펜실베니아(Pennsylvania) 주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윤산온(尹山溫)이다. 12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피츠버그(Pittsburg) 소재 한 은행의 보조 점원(Assistant Casher)으로 일하던 22살 때까지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고 가정을 돌보았다. 1893년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장로교 학교인 파크중학교(Park Junior High School)에 들어가 1897년에 졸업하고, 이어서 파크 칼리지(Park College)에 들어가 1901년에 졸업하였다. 1903년 피츠버그 대학교(University of Pittsburg)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아이오와(Iowa) 주 코에대학(Coe College)에서 교육심리학을 교수하였으며 그 대학 부속 고등학교 교장을 겸하였다. 1902년부터 1905년까지 미국 북장로회 아이오와 대회(the Iowa Synod)의 목회자 연수과정을 거쳐 그해 5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4년 파크대학 설립자 존 맥아피(John Armstrong McAfee)의 딸 헬렌 맥아피(Helen Bailey McAfee)와 결혼하였다. 같은 해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사에 임명되어 1905년 9월 부인과 함께 내한하였다. 평양선교지부(Pyeng Yang Station)에 배치되어 한국어를 배우면서 숭실학교(崇實學校)에서 교수하였다. 1909년 평북 선천선교지부(Syen Chun Station)로 전임하여 신성학교(信聖學校) 교장을 맡았다. 1911년 10월 일제가 조작한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신성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구속되자, 이 사건을 선교 본부에 보고하고, 구속자들의 석방과 공정한 재판을 위해 활동하였다. 1913년 3월 하순경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전에 교수로 재직했던 코에대학에서 1914년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11월 19일 가족과 함께 다시 내한하여 선천선교지부에 복귀하였다. 부흥회 등에서 배일사상을 고취하여 1915년 1월 12일 평안북도 경찰부장에게 불려가 ‘훈계’를 들었다. 1918년 8월 장로회 평북노회 노회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10월 미국에 돌아갔다가 이듬해 초 다시 내한하던 길에 서울에 들러 1919년 2월 3, 4일경 학생독립운동을 계획하던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원벽(金元壁)을 세브란스병원에서 만나 격려하였다. 그해 3월 8일 선천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일제 군경의 탄압과 만행이 자행되자, 목격 상황을 친필로 기록하였다. 이를 일제의 우편 검열을 피하기 위하여 캐나다로 여행하는 사람에게 맡겨 캐나다에서 미국 시카고에 있던 『컨티넨트(The Continent)』 잡지사로 보내 게재하게 하였고,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이 밖에도 만세운동 당시 많은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1920년 9월 1일 선천경찰서에 폭탄 투척 의거를 하다가 체포된 신성학교 학생 박치의(朴致毅)를 변호하여 ‘온량한 학생으로 결코 폭탄을 던질 사람이 아니다. 분명히 관헌들의 고문에 마지못해 자백했을 것’이라는 고문설을 유포시켰다. 이런 행적 때문에 ‘극단적인 배일자(排日者)’로 지목되어 일제의 감시를 받다가 1921년 2월 22일 장남의 심장병을 치료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에서는 그해 3월 2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환영 만찬회를 열어주었다. 이 후 언론과의 인터뷰와 강연을 통해 한국과 한국교회의 상황을 설명하고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같은 해 8월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 주 휴론대학(Huron College) 학장에 취임하여 7년 동안 재직하였다. 1928년 5월 9일 다시 내한하여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숭실학교의 교장직을 겸임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 일제가 신사참배를 다시 강요하기 시작하고, 평안남도 지사가 1932년 9월 18일 이른바 ‘만주사변 1주년 전몰자위령제’에 학생들을 참배시키도록 통첩하였으나 다른 기독교 학교들과 함께 이를 무시하고 불참하였다. 그러다가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1935년 10월 24일부터 3일간 각도의 학무과장과 사범학교장을 포함한 시학관들을 중앙으로 불러 회의를 갖고, “국가관념의 함양에 관한 건, 경신숭조에 관한 건, 국어사용의 보급 철저에 관한 건, 사립학교 지도 감독에 관한 건, 심전개발에 관한 건, 교화사업에 관한 건” 등을 지시하였다. 평안남도 지사는 같은 해 11월 관내 공사립 초등학교장 회의와 중등학교장 회의를 잇달아 소집하여 이러한 상부의 지시를 전달하고 실행을 독려하였다. 그런데 초등학교장 회의가 끝나는 날 평양신사에 참배하게 하였으나 기독교인 학교장들이 빠져나가 신사에 참배하지 않았다. 이어서 같은 해 11월 14일 개최한 평남 중등학교장 회의에서 야스타케 타다오[安武直夫] 평남지사는 회의를 개회하기 전에 평양신사에 참배하고 나서 회의를 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자 숭의여학교 교장 대리 정익성(鄭益成), 순안 의명학교 교장 리(H. M. Lee, 李希滿)와 함께 그런 일은 전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 상 지시를 따를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이에 평남지사는 금후의 신사참배 참여 여부는 물론 학생들의 신사참배 여부를 명확하게 서면으로 회답하도록 요구하였고, 그 회답의 내용에 따라 학교장직 파면은 물론 학교 강제 폐교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날로 이 사건을 긴급전보로 북장로회 선교부 실행위원장 홀드크로프트(J. G. Holdcroft, 許大殿)에게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해 12월 13일 평남지사에게 최종적인 회답을 유보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12월 20일에 숭실학교 이사회에 교장직 사퇴서를 제출하였으나, 교장으로서 잘못이 없다는 이유로 수락되지 않았다. 이후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의 소집으로 12월 30일 북장로회 선교부 실행위원장 홀드크로프트, 위원 솔토과 함께 가서 신사참배에 따르도록 설득당하고 경고 받았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사퇴하기 보다는 파면당하는 것이 오히려 떳떳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1936년 1월 18일자로 기독교의 교리와 양심상 자신이 신사참배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참배를 시킬 수 없다고 최종 서면으로 답변함으로써 그날로 숭실학교장직과, 1월 20일 숭실전문학교장직 인가를 취소당하였다. 같은 해 3월 21일 안식년이었으므로 가족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4월 초순경 미국에 돌아가는 길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들러 한국인들의 환영을 받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정책을 비판하였고, 귀국해서도 비판 강연과 기고를 계속하였다. 그해 재미 유학생 단체인 북미대한인학생회(The Korean Students League of North America)의 자문위원을 맡았고, 1936년부터 1941년까지 시카고 무디성경학교(Moody Bible Institute)에서 교수하였다. 1938년 1월호 『프레스비테리안 트리뷴(The Presbyterian Tribune)』지에 “너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제목으로 신사참배 절대불가론을 게재하여 당시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학교 유지를 위해 ‘신사참배 순응’을 주장하던 언더우드(H. H. Underwood)와 논쟁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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