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淳基
崔淳基1924. 7. 29 ~ 1990.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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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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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24년 7월 29일 전라북도 전주부(全州府) 완산정(完山町)에서 태어났다. 일제 말기에는 방산봉차랑(芳山逢次郞)이라는 창씨명을 사용하였다. 세농(細農)의 가정에서 자라나 전주 제2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40년 3월 1일 고학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석령회사(石齡會社) 직공 등으로 일하면서 학업을 위해 도쿄(東京) 칸다(神田)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하였지만 졸업하지 못하고, 1942년 12월 귀국하였다. 1942년 12월 28일 전주부 청수정(淸水町)의 송정섭(宋正燮) 집에서 “창씨개명을 한다 해도 결코 조선인의 혼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당부와 함께 독립을 목적으로 민족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고, 독립운동에 매진하기로 결심하였다. 이후 고향에서 박윤하(朴潤河)·김병순(金炳純)·최태기(金泰基) 등과 교유하면서,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 등을 모색하였다. 1943년 1월경 전주부 완산정에 위치한 박윤하의 집에서 김병순·최태기 등과 회합하였다. 이 자리에서 박윤하가 “점점 전쟁은 장기전이 되면 일본은 불리하며 우리 조선의 독립할 날도 가까워진다. 시국이 우리 조선 민족에 독립의 호기를 주고 있는 현재 우리들은 인도의 간디처럼 조선을 위해 분투해야 한다”고 하면서 장기화된 태평양전쟁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일제의 상황과 인도의 독립운동 등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러한 박윤하의 말에 공감하여 “저 고령자가 이렇게 분투하는데 우리들이 하는 일 없이 보냄은 부끄러우니 점차 크게 분발하자”고 결의하였다. 같은 달 박윤하의 집에서 다시 회합한 후 이 자리에서 “현재 일제의 탄압으로 표면으로 드러나지 못하고 있지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에서 무력을 양성하며 독립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면서, 국내 민족주의자들이 만주 독립운동가들과 호응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키면 독립을 성취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같은 해 2월에는 같은 장소에 다시 만나 “입으로 내선일체를 말하지만 무엇이 내선일체인가. 일본인은 자유롭게 조선에 와도 우리들은 일본으로 여행하는 것은 마치 외국에 가는 것 같이 엄중한 단속을 받고 있다”고 일제의 식민정책인 내선일체에 대해 비판하며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조선독립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항일의식을 기르면서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다가 1943년 8월경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1944년 6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단기 1년 장기 3년을 받고 옥고를 겪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조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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