表義淑
表義淑1921. 7. 18 ~ 2008. 1. 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평양사단 한국인학병 모반사건(평양 학병의거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21년 7월 18일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경제리(鏡齊里)에서 표영수(表永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0년 3월 일본 도쿄(東京)의 사립 오오세이중학교(大成中學校)를 졸업하고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정치과에 입학하여 1943년 9월 졸업하였다. 1943년 10월 20일 일제 육군성령(陸軍省令) 제48호에 의해 ‘조선인 학도지원병제’가 실시되자, 어쩔 수 없이 11월에 원서를 내고 12월 중순 평양에서 전형검사를 받았다. 이어 1944년 1월 20일 조선군관구(朝鮮軍管區) 평양사단(平壤師團) 예하 39여단(旅團)으로 입영하였다. 6개월간 기초군사교육을 이수한 후 공병(工兵) 제48부대의 아사다대[秋田隊]에 배속되었다. 입대 후 시행된 간부후보생 채용시험에 불합격하는 한편 내무반 생활에서의 구타와 기합, 민족차별과 멸시가 일상화된 현실에서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이 참으로 기만적임을 실감하고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다른 학도병들도 상당 정도 공유하고 있었다. 7월 중순경부터 보병 42부대 내에 비밀결사 삼천당(三千黨)이 결성되어 장차 집단행동으로 대일항쟁을 벌이려는 계획이 만들어졌다. 구체적으로는 부대 탈출을 감행한 후 평안남도 양덕(陽德)에 집결하여 민간인 김한복(金漢福)의 안내를 받아 한만국경 지대와 개마고원 남쪽의 부전고원(赴戰高原) 등 산악지대로 들어가 항일 게릴라전을 펼친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인접한 보병 44부대와 포병 47부대 및 치중병 48·50부대의 학도병들에게 은밀히 전파되었고, 합동교육훈련이나 영내 조우를 통한 상호연락과 정보교환이 이루어지면서 연계의거 준비가 본격화하였다. 8월말 경에 42부대의 박지권(朴志權)으로부터 ‘김완룡(金完龍)을 중심으로 집단탈출 계획이 진행되고 있고, 탈주 후에는 백두산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펴기로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이에 적극 찬동하여 소속 부대의 학도병을 규합해 42부대와 협력하기로 결의하였고, 탈출계획의 진척 사항에 관한 통신 연락을 자진해서 담당하였다. 탈출거사 실행을 위해 2개 지대를 두기로 하면서 48부대의 동지 학도병들은 제2지대 제3분지대(分支隊)로 편제되었다. 거사 결행일은 추석날인 10월 10일로 약정되었다가, 사정상 11월 1일로 연기되었다. 그러던 중 47부대의 노영준(盧永濬)이 포섭 및 협조 부탁차 접촉했던 추을(秋乙)헌병대 보조원 임영호(林永鎬)가 밀고하여 일제 헌병대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결국 김완룡이 일본군 상등병을 구타한 사건이 빌미가 되어 학도병에 대한 검거가 대대적으로 개시되었고, 그 과정에서 거사 계획의 전모가 드러나고 말았다. 헌병대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한 후, 1945년 6월 10일 평양사관구(平壤師管區) 법정에서 열린 군사재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서울의 육군형무소로 이송되어 옥고를 겪다가 8·15 광복으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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