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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중

姜贊中

미상 ~ 1909.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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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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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의병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정미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출생 연도와 출신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1909년 10월 3일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순국할 당시 56세였으므로 1854년경 태어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1894년 12월 전라도 태인현(泰仁縣, 현재 전북 정읍시 태인면의 동구천) 일대에서 동학(東學) 접주(接主)로 활동하다가 체포된 동명(同名)의 인물이 있는데, 동일인 여부는 확인이 필요하다. 1907년 일본의 노골적인 내정간섭과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저항하려고 전국적인 의병 전쟁인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그 중 호남의 의병들은 특별한 활약상을 보였다. 특히 전국 연합 의병이 패배하여 흩어진 후에도 호남 의병들은 소부대 위주로 전열을 가다듬고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09년까지 지속해서 의병 항쟁을 이어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1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빠르게 이동하면서 군자금 모집, 친일 세력 응징 등의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은 호남 지역 의병을 진압하고자 1909년 9월부터 10월 25일까지 이른바 ‘남한대토벌(南韓大討伐)작전’을 전개하였다. 일본은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2,200여 명의 병력과 현지 헌병 및 경찰까지 동원해 대대적인 수색과 탄압 작전을 병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소부대 중심으로 활동하던 호남의 많은 의병 부대는 불가피하게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고 큰 손실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1909년 10월 3일 전남 영암군(靈巖郡) 봉덕리(鳳德里, 현재 영암군 금정면 용흥리 봉덕마을 일대)에서 일본군 보병 제2연대 병력과 교전하게 되었다. 당시 10여 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그 자리에서 전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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