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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升泰

韓升泰

1867. 5. 10 ~ 1935.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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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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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박천(博川)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박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유인석 의병부대
  • · 종유계
  • · 학계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전기의병
  • · 중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67년 5월 10일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 남면(南面) 소봉동(松峯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한원백(韓元伯)이다. 1890년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수학하였다. 1895년부터 유인석 의병부대에 참여하였고, 1905년과 1910년 종유계(宗儒契)와 학계(學契)를 각각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유인석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부대를 일으키고 충주성을 점령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으로 충주에서 제천으로 후퇴한 후 버티기 어려워 서북쪽으로 이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인석은 국내에서 더이상 의병활동을 이어가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청나라로 망명하기로 결정하였다. 1896년 유인석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퉁화현(通化縣) 오도구(五道溝)에 정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 21명만 유인석과 함께 남고 망명한 240명 중 219명이 국내로 돌아올 때,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인석이 1897년 고종의 조칙을 받고 일시 귀국하였다가 1898년 2월 다시 망명을 할 때 국내에서 71명이 따라 갔는데, 여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900년 8월 유인석이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크게 일어나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귀국해 평안도 지역에 머무르며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강학(講學) 활동에 주력하였다. 이때 유인석을 수행하며 각 지역에서 강학을 비롯한 항음례(鄕飮禮) 등을 개최하였고, 이를 통해 주자학적 민족주의를 전파하는데 힘을 보탰다. 1902년에는 유인석 의병부대의 활동, 개항 이후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위정척사운동의 전모와 존왕양이론, 유인석이 보낸 격문과 편지 등을 모은 『소의신편(昭義新編)』 간행에 동참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되자 평안도 여러 지역에서 다시 의병이 봉기하였고, 각 군에서는 종유계가 조직되었다. 종유계는 의병을 지원하고 동시에 일진회(一進會)를 배척하기 위해 유생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였다. 이때 종유계의 박천지역 책임자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활동은 유인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인석은 의병운동을 위한 기반을 만들기 위해 문인들과 함께 향약을 조직하고, 1904년 9월 관서지역의 문인들에게 글을 보내 ‘천하의 어떠한 대사도 이 계가 없다면 불가능하다’면서 계의 조직을 촉구하였다. 유인석은 관서에서 시작된 계 조직을 전국으로 확장한 후, 이를 향약 조직으로 확대하여 유생·관리·백성까지 참여하는 국권회복운동의 기반 조직으로 발전시키려고 하였다. 1910년에는 학계를 조직하여 의병운동을 위한 자금을 모집하다가 붙잡혀 2개월 동안 옥고를 겪었다. 일설에는 1908년 5월 유인석이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자, 이를 전후하여 유인석을 따라가 수행하였다고도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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