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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俊聖

黃俊聖

1880 ~ 1910.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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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黃俊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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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진안(鎭安)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북도 진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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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강성택 의병부대
  • · 황준성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86)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86) 전라북도 진안군(鎭安郡) 남면(南面) 오정리(五丁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0년 당시 31세이므로 1880년생으로 추정된다. 본적은 한성부(漢城府) 남문(南門) 내동(內洞)이다.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한 황준성(黃俊成)을 썼다. 일제 보고서에 학생(學生)으로 문부(文符)를 능히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08년부터 강성택(姜成宅)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가, 1909년 의병장으로 항일투쟁을 주도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 군인으로 군대 해산에 대항하다가 붙잡혀, 1908년 1월 28일 평리원에서 이른바 내란죄로 유형(流刑) 10년을 받았다. 전남 완도군(莞島郡) 군내면(群內面) 죽청리(竹靑里)로 유배된 후, 유배소 인근의 아이들을 모아 한문을 가르쳤다. 1909년 5월 2일 탈출하여 강성택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이후 김성택(金聖澤)·이병현(李炳鉉)·권동신(權東信) 등을 이끌고 완주군 고금도(古今島)·청산도(靑山島)·여호도(麗湖島) 등과 해남군(海南郡)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전남 해안지역에는 여러 섬에 거점을 두고 해상에서 활동하는 의병부대가 상당수 있었다. 이때 추기엽(秋琪燁)·황두일(黃斗一) 등이 이끄는 의병부대와 연합해 전남의 섬과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 6월 21일 김성택 등 약 8명을 이끌고 청산도로 들어가 도청리(道淸里)를 포함한 4개 마을의 이장으로부터 50여 원을 군자금으로 모집하였다. 6월 23일에는 여서도(餘瑞島)로 들어가 중리(中里)에 거주하는 김기선(金基宣) 등으로부터 군자금으로 약 100원을 징수하였다. 7월 7일 해남군 북종면(北終面) 이진리(梨津里)에서 추기엽·황두일 의병부대와 회합하고 연합 의병부대의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부하 60~70명을 이끌고 해남군 미황사(美黃寺)와 대둔사(大芚寺)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7월 8일에는 미황사 인근에서 일진회(一進會) 회원인 박원재(朴元在)와 진태진(陳泰鎭)이 일제 헌병의 밀정 노릇을 하고 있는 정황을 포착하고, 이들을 체포해 해남군 현산면(縣山面) 초평리(草坪里)에서 처단하였다. 하지만 같은 날 대둔사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30~4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큰 피해를 입고 피신하였다. 그러다가 같은 해 10월 29일 일본군 완도수비대에 자수한 후 11월 14일 완도 순사주재소로 넘겨졌으며, 12월 2일 해남경찰서로 호송되어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한편 판결문에는 12월 7일 해남경찰서에 자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0년 2월 26일 광주지방재판소 목포지부에서 이른바 안녕질서 위반과 불경죄로 교형(絞刑)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3월 19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그해 4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1910년 5월 21일 대구감옥에서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구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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