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장계
1882 ~ 1947. 12. 1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아동제사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중한문화협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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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8)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창현(滄縣)에서 장난(張南)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료에 따르면 1882년생으로 추정된다. 원래 이름은 푸(溥)이며, 19살 때 지(繼)로 개명하였다. 자는 부천(溥泉)이고, 필명은 박천(博泉)·자연생(自然生)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이전부터 독립운동가들과 교유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897년 바오딩(保定) 연지서원(蓮池書院)에서 공부하였는데, 부친 장난이 연지서원 재장(齋長)이었다. 189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 선린서원(善隣書院)에 들어갔다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하여 정치경제학을 배웠다. 『프랑스대혁명』·『민약론(民約論)』 등을 통해 혁명사상을 접하였고, 당시 청 왕조의 부패상을 목도하면서 반청(反淸) 혁명사상을 갖게 되었다. 장빙린(章炳麟)·황싱(黃興)·쑨원(孫文) 등과 교유하였으며, 1902년 동경유학생청년회(東京留學生靑年會)에 참여하였다. 1903년 귀국하여 상하이(上海)에서 장빙린·쩌우룽(鄒容)·장스자오(章士釗) 등이 참여하고 있는 반청(反淸) 혁명 성향의 신문 『소보(蘇報)』에 합류하였다. 이후 반청 여론을 주도하던 『소보』가 폐간되자, 장스자오 등과 『국민일일보(國民日日報)』를 창간하고 편집을 맡았다. 1904년 창사(長沙)로 가서 명덕학당(明德學堂)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이때 황싱 등과 화흥회(華興會)를 결성하였으나, 얼마 후 광시(廣西) 순무(巡撫)를 역임한 왕즈춘(王之春)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황싱 등과 붙잡혀 구금되었다. 풀려난 후 다시 일본에 가서 1905년 쑨원(孫文)이 결성한 동맹회(同盟會)에 참여하여 동맹회 본부의 사법부판사(司法部判事)와 기관지 『민보(民報)』의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다. 1908년 1월 일본의 아나키즘 조직인 금요회(金曜會) 활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자 프랑스 파리로 가서 아나키스트인 리스쩡(李石曾) 등과 『신세기(新世紀)』를 창간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난 후, 중국으로 돌아와 1912년 8월 동맹회를 국민당(國民黨)으로 개편·창당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때 상하이에서는 신규식(申圭植) 등이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였다. 당시 신규식은 쑨원의 동맹회에 가입하여 신해혁명에 참여하였으며 중국 혁명인사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중국이 상호연대와 우호를 바탕으로 한·중 양국의 혁명운동을 전개한다는 취지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가 조직되었다. 1913년 참의원(參議院) 의장이 되었고, 신아동제사 회원으로 참여하여 신규식 등과 유대 관계를 맺고 한국의 독립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17년 쑨원을 따라서 광저우(廣州)로 가서, 같은 해 수립된 광둥정부(廣東政府)의 주일대표(駐日代表)가 되었다. 1920년 귀국 후에는 군정부 고문을 비롯하여 1921년 국민당 선전부장, 1923년 국민당 베이징(北京)지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2년 11월에는 쑨원의 친서를 휴대하고 베이징에서 소련특사 요페(Joffe)와 회견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한인독립운동가들과의 교류도 지속되었는데,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인 조소앙(趙素昻)과 관계가 깊었다. 조소앙이 1904년부터 1912년까지 8년 간 일본에서 유학할 때 알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1922년에는 2년 간 유럽과 소련 등지를 순방하며 외교활동을 펼친 조소앙을 상하이로 초청하여 쑨원과의 회담을 주선하였다. 조소앙도 이승만(李承晩)에게 쑨원을 ‘옛 친구’로 “우리나라 일에 오래도록 힘쓰고 있다”고 소개하며 교류를 권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인 아나키스트와의 교류도 적극적이어서, 중국인 무정부주의자 차이위안페이(蔡元培)·리스쩡·우즈후이(吳稚暉) 등과 함께 1924년에 결성된 흑기연맹(黑旗聯盟)을 지원하였다. 그 결과 1925년 초 중문판 기관지 『동방잡지(東方雜誌)』가 발간될 수 있었다. 한편 1924년 1월 제1차 국공합작이 성사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회의에서 제1기 중앙감찰위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6월경 중국공산당과의 결별을 요구하는 ‘공산당 탄핵안’ 제출에 참여하여 쑨원의 질책을 받고, 상하이로 떠났다. 쑨원이 사망한 후인 1925년 11월에 서산회의파(西山會議派)를 조직하고 국공합작을 반대하였다. 1926년 7월 시작된 북벌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며 장제스(蔣介石)가 점차 세력을 장악하자 장제스를 지지하였다. 1928년 11월 국민정부 입법원 부원장, 1931년 입법원 원장, 1933년 정무관(政務官) 징계위원회 위원, 국민당 화북판사처주임, 1937년 국민당 중앙감찰위원, 당사사료편찬위원회 주임위원, 1939년 중앙위로단(中央慰勞團) 단장 등 중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1942년 10월 충칭(重慶)에서 한·중인사가 공동으로 참여한 민간우호단체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의 명예이사로도 이름을 올렸고, 임시정부나 중한문화협회가 주관하는 행사 또는 한국독립운동과 관련된 일에 적극 참여하며 한·중 우호를 강조하였다. 1943년 3월 1일 오후 3시 임시정부 주관으로 충칭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개최한 한국 ‘3·1혁명 24주년 기념식’에도 국민당 중앙감찰위원회 위원 신분으로 참석하였다. 1945년 11월 4일 장제스 부부가 중국국민당 중앙당부 강당에서 개최한 ‘한국 혁명지도자 환국축하회’ 자리에도 국민당 중앙집행위원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다음날인 11월 5일 오전 7시 임시정부 주석 김구 등 국무위원과 각부 부장 일행 30여 명이 충칭을 떠나 상하이로 출발할 때, 스투더(司徒德) 등과 비행장에 나와 임시정부 요인을 환송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정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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