丁豪鉉
丁豪鉉1891. 4. 11 ~ 1940. 7.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산서면 동화리 장터 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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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1년 4월 11일 전라북도 장수군(長水郡) 산서면(山西面) 오성리(五聖里)에서 태어났고, 산서면 하월리(下月里)에서 거주하였다. 농업(農業)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산서면 동화리(桐花里) 장터에서 태극기를 꽃은 장대를 들고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이 만세시위를 주동한 인물은 유생(儒生) 박정주(朴政柱)였다. 그는 전국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장수군 일대에서 동화리 장날을 기해 대규모 시위를 일으키려고 계획하였다. 3월 19일 오후 3시 박정주는 마을 주민 김경수(金京洙)의 집 동쪽 밭에서 미리 준비했던 태극기를 가지고 동화장터에 왔다. 이때 박정주가 만든 태극기를 묶은 장대 2개 중 하나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정봉수(丁奉洙)와 함께 각각 태극기를 묶은 장대를 높이 들고, 박정주와 함께 동화리 장터를 돌면서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당시 김형택(金炯澤)·이화백(李化伯)·이길선(李吉善)·이상욱(李相煜) 등 장터에 모인 약 200 명의 마을 주민들도 시위대에 합류하여 다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동화장터를 행진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 있다가 이 모습을 지켜본 동화헌병주재소(桐花憲兵駐在所) 헌병보조원(憲兵補助員) 장재권(張在權)으로부터 박정주·정봉수와 함께 즉시 해산할 것을 요구받았다. 하지만 시위 주도인물들과 함께 장재권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러자 헌병주재소장인 헌병 상등병(憲兵 上等兵) 오카치 토요키치(岡地豊吉)가 장재권과 합류하여 시위 주도인물 체포에 나섰다. 이때 들고 있던 태극기를 묶은 장대도 일제 헌병에게 빼앗긴 후 박정주·정봉수와 함께 동화헌병주재소에 끌려가 구금되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약 200명의 시위대가 동화헌병주재소로 몰려가 헌병들을 협박하며 체포한 이들을 풀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석방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폭력을 사용하겠다고 위협을 가하는 시위대의 기세에 압도당한 일제 헌병들에 의해 결국 오후 5시경 풀려났다. 이후 나머지 시위대와 함께 산서면사무소(山西面事務所) 앞으로 행진하여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2~3회 연달아 부르고 나서 박정주의 독립 축하 연설을 듣고 스스로 해산하였다. 하지만 만세시위가 종료된 직후 다른 시위 주도인물들과 함께 일제 헌병에게 붙잡혀 기소되었다. 1919년 5월 2일 광주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그해 7월 26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1년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고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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