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덕
高光德1874. 3. 4 ~ 1945. 10. 1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고광순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중기의병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4년 3월 4일 전라북도 남원군(南原郡) 백암방(白岩坊) 응출촌(應出村, 현 남원군 이백면 효기리 일대)에서 현릉참봉(顯陵參奉)을 지낸 고종주(高宗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원주 이씨 이면흠(李勉欽)의 딸이다. 본관은 장흥(長興)이고,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이다. 자(字)는 한숙(漢淑), 호는 청봉(晴峰)이다. 본명은 고광수(高光秀)지만 일본군에게 의병장으로 잘 알려지면서 본명을 감추려고 호적에 이름을 고광덕으로 바꿔 신고하여 고광덕이란 이름으로 공훈을 추서받게 되었다.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서당에서 글을 배우며 학업에 정진하였다. 10세 때 남원에서 시행한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였고, 1890년 16세 때 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소과(小科) 중 하나인 진사복시(進士覆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부친이 소과에 합격해 생원이 된 데 이어 진사가 됨으로써 남원에서 손꼽히는 명문가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겪으면서 가산에 큰 피해를 입었고, 1895년 부친 고종주가 무고를 당해 처형되자 일흔이 넘은 조모와 가족을 책임지게 되었다. 1907년 1월 24일 전남 창평군(昌平郡) 저산면(猪山面) 분암리(墳庵里) 전주 이씨 제각에서 고광순(高光洵)이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창의하였다. 이때 참모이자 선봉장으로 임명되어 고광순을 보좌하였다. 남원에서 일어난 양한규(梁漢奎) 의병장이 남원읍 공략을 위한 연합 작전을 제의하자 고광순과 함께 의병부대를 이끌고 즉시 남원성으로 진격하였다. 1907년 2월 13일 밤 먼저 남원성을 기습 공격한 양한규 의병부대는 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양한규 의병부대는 진위대의 무기와 군수품 일체를 접수하고 도주하는 진위대 군사를 추격하였다. 그 와중에 의병장 양한규가 탄환에 맞아 전사하며 전세가 역전되었다. 2월 14일 고광순 부대가 남원에 도착하였을 때 양한규 부내는 본진이 와해된 상태였다. 이에 고광순을 호위하며 소수의 부대원만 이끌고 급히 퇴각하였다. 겨우 대열을 정비한 후 4월 25일 고광순의 지휘 하에 1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화순읍을 점령하고, 평소 원성이 자자하던 일본인 집과 상점 10여 호를 소각하였다. 다음 날 다시 동복(同福, 지금의 和順郡 同福面)으로 진군하다가 광주에서 파견된 관군과 도마치(圖馬峙)에서 교전한 끝에 패배하여 일시적으로 흩어졌다. 1907년 9월 11일 고광순이 도독이 되고, 신덕균(申德均)·윤영기(尹永淇) 등을 참모로 삼아 편제를 정비하여, 지리산 피아골을 근거지로 삼아 장기 항전을 구상하였다. 지리산 진격을 위해서는 보성(寶城)에서 남원을 거쳐 서울로 올라가는 교통의 요지인 동복 지역을 공략할 필요가 있었다. 9월 15일 새벽에 동복의 헌병분견소를 공격하였으나 도포사(都炮士) 박화중(朴化中)이 전사하는 등의 피해를 입고 패배하였다. 의병들과 함께 남원의 효기리 응령(應嶺)으로 물러나 숙영하였다. 이때에도 고광순을 호위하고 유격전을 지휘하면서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 고립된 고광순 의병부대가 군자금 부족을 겪고 있던 상황에서 자신의 전 재산인 1,000여 석 가량을 모두 희사하였다. 훗날 일본군이 집을 불태워버리는 만행을 저지르자 가족들도 모두 지리산으로 이주하여 남의 집 곁방에 사는 어려움을 겪었다. 고광순과 부대원들은 9월 18일 남원에서 곡성(谷城)·광양(光陽)·구례(求禮)를 거쳐 지리산 화개동(花開洞)을 지나 피아골 계곡 아래에 자리 잡은 연곡사(鷰谷寺)에 도착하였다. 고광순은 연곡사를 의병부대의 본영으로 삼고 ‘불원복’不遠復 세 자를 쓴 태극기를 군영 앞에 걸고 장기 항전의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고광순 의병부대와 합류하고자 지리산 문수암 일대에 주둔 중인 김동신(金東臣) 의병부대를 진압하려고 지리산 화개동에 일본군이 진입하였다. 김동신 의병부대를 공격한 일본군은 연곡사의 고광순 의병부대도 탄압하고자 진해만의 중포대대(重砲大隊)의 소대 병력, 광주(光州)에서 출동한 1개 중대, 그리고 진주경찰서 순경 등을 지원받았다. 이후 쌍계사 뒤편 신흥리(新興里)에 집결한 일본군은 1907년 10월 16일 새벽 통곡봉 밑 능평재를 넘어 연곡사 뒤편 계곡으로 빠르게 침입해 왔다. 일본군의 침입 소식을 들은 고광순은 부대를 둘로 나누게 한 후 화개동을 급습하도록 하였다. 이때 한 부대를 이끌고 외곡(外谷)을 넘어 화개동으로 향하였다. 연곡사 뒤 당치재를 넘어 능평재 오른쪽에서 윤영기(尹永淇)가 이끈 다른 한 부대와 합류한 후 일본군을 협공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능평재를 넘어 연곡사로 진입한 일본군과 길이 엇갈리면서 연곡사에 남아 있던 고광순과 호위 병력 10여 명이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말았다. 그 결과 고광순과 고제량(高濟亮) 등은 전사하고, 연곡사는 불탔다. 연곡사 전투 이후 소규모 부대원을 이끌고 잠복하면서 고광문(高光文)·이평국(李平局)·강사과(姜司果) 등과 재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11월 15일 남원의 자택을 방문한 사실을 알아챈 일본군 변장대 5인의 습격을 받아 박갑용(朴甲用)·김태형(金泰亨) 등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이때 화승총 8정, 화약과 탄환, 화약 재료인 질산칼륨 등을 소지하고 있다가 압수당하였다. 남원경무분서에 구금되었으나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김태형과 함께 옥을 부수고 탈출하였다. 1908년 2월 장성군 백양사(白羊寺)에서 박처사와 남원의 고진사(高進士), 퇴직 주사(主事) 국기주(鞠奇柱)와 회합하고, 3월 초에는 전북 정읍 내장사에서 의병 80여 명과 회합하는 등 재기를 도모하였다. 무등산 부근에 잠복한 의병 200여 명에게 3월 7일 광주 습격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밀정에 의해 이 사실이 누설되어 계획은 실행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부터 1914년까지 이석용(李錫庸) 의병장과 힘을 합하여 남원·임실(任實)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이어 나가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큰딸이 15세 무렵에 동갑인 이석용의 장남 이원영(李元泳)과 혼례를 올리는 등 이석용과 친분이 두터웠다. 일본군에게 쫓기면서 의병 활동을 더는 이어갈 수 없게 되자 금강산의 유점사(楡岾寺)로 들어가 은신하다가 1918년 만주로 건너가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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