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간
高秉幹1899. 12. 24 ~ 1966. 12. 1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8)
관련 사건
- · 선천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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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8) 1899년 12월 24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월화면(月華面) 마룡동(麻龍洞)에서 태어났다. 호는 영서(瀛西)이다. 이명은 고평간강(高平幹康)·고병관을 사용하였다. 의주 신영소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평북 선천(宣川) 신성학교(信聖學校)에 입학하였다. 기독교 계열인 신성학교는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학교였다.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선천면의 만세 시위는 신성학교 학생 및 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신성학교 교사 홍성익(洪盛益)은 학교 근처 남교회 목사 김석창(金錫昌)과 같은 학교 교사 김지웅(金志雄) 및 양준명(梁濬明) 등과 논의하여 선천군 만세 시위를 추진하였다. 1919년 2월 27일 저녁 장일현(張日炫)·박찬빈(朴賛彬)·김봉성(金鳳性) 등과 함께 김지웅 교사를 만나 만세 시위의 취지를 설명 듣고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를 건네받았다. 이후 학교 기숙사인 캐롤린홀 4층 지붕 아래 밀실에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2·8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500여 매를 만들었다. ‘대호! 한국 청년’이라고 쓴 대형 깃발도 제작하였다. 한편, 홍성익·김석창·양준명 등은 3월 1일 오후 2시 학교 종소리를 신호로 시위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거사 당일 정오 기도회 시간에 집회실에 전교생들과 함께 모였다. 그때 홍성익이 교단에 등장하여 혈서로 ‘한국독립’을 크게 쓰면서 만세 시위에 나설 것을 주창하였다. 그 즉시 전교생 및 교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오후 2시 종소리를 신호로 교문을 뛰쳐나가 시민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주었다. 인근 보성여학교 학생들도 태극기를 들고 합세하였다. 남교회 앞을 지나 북교회를 거쳐 거리로 진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중이 계속해서 몰려들어, 천남동시장에 이르렀을 때 1,000여 명에 달하였다. 김지웅 교사가 군중 한가운데서 전날 서울에서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시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형 깃발과 태극기를 들고 군중의 선두에 서서 시위 행진을 이끌고 군청, 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1시간쯤 지나 일본군 선천수비대가 기마경찰대와 출동하여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자 충돌이 일어났고, 일본군은 즉시 발포하였다. 이로 인해 시위대는 흩어졌고 현장에서 검거되었다. 1919년 6월 3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상고하였다. 같은 해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됨으로써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상고 취지에서 “한국 민족으로서 생존 존영을 얻으려면 독립 밖에는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출옥 후 신성학교에 복학하였고 1925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34년 일본 교토(京都)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외과교수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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