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영선
郭永善1902. 3. 1 ~ 1980. 4. 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8)
관련 사건
- · 신천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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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8) 1902년 3월 1일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신천면(信川面) 사직리(社稷里)에서 아버지 곽임대(郭臨大, 일명 곽태종)와 어머니 안태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안태희는 안중근(安重根)의 5촌 고모이다. 아버지 곽임대는 1911년 일명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적이 있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에 가입하여 안창호(安昌浩) 등과 활동하였다. 1920년에는 노백린(盧伯麟)과 비행사양성소를 설립, 운영하면서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신천면은 황해선의 중심지로 교통이 편리하여 각지에서 들어오는 소식이 빠르게 전달되는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헌병은 신천면을 엄중히 감시하고 있었고, 특히 기독교인들의 동향을 주시하였다. 신천면의 만세 시위는 기독교인 김영호(金永昊)·이용규(李容圭)·이창화(李昌華)·홍종준(洪鍾俊)·왕경애(王敬愛)·곽영애(郭永愛) 등을 중심으로 준비되었다. 거사일은 신천면 장날인 3월 27일로 잡았다. 당시 평양 숭의여학교에 재학하던 중 휴교령으로 고향인 신천군으로 돌아와 있었다. 만세 시위가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3월 24일 무정리(武井里)의 곽현종(郭賢鍾), 척서리(滌暑里)이 백영서(白永瑞) 등과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한편 무정리의 이봉서(李鳳瑞)는 3월 26일 사직리의 기독교 조사(助事) 김형식(金亨植)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얻어 김일환(金日煥) 등과 독립선언서 약 280매를 인쇄하였다. 3월 27일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신천면의 시장으로 향하였다. 오후 1시경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포하고, 200여 명의 시위대 선두에 서서 독립 만세를 외치고 행진에 나섰다. 헌병이 발포하면서 주동자를 검거할 때 체포되었다. 이후에도 시위대는 해산하지 않고 10~20명씩 소규모로 뭉쳐 다니며 곳곳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날 만세 시위는 밤 10시까지 이어졌다. 해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1919년 7월 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1일 또다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상고 취지에서 ‘이번 만국 강화회의에서 주창된 인도정의, 민주자결에 따라 한국 인민도 인성(人性)으로서 무심하게 지나갈 수 없어 만세를 부른 것’이라 주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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