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억
姜萬億1900. 1. 14 ~ 1950. 8. 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6)
관련 사건
- · 정산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6) 1900년 1월 14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해남리(海南里)에서 태어났다. 정산 3·1운동은 백곡리(白谷里)의 홍범섭(洪梵燮)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그는 3월 중에 상경하여 종로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해 귀가하였다. 서정리(西井里) 장날인 4월 5일 아침에 20~30대 연배들인 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을 자택으로 불러서 독립선언서를 함께 읽었다. 이어 “우리도 망국의 한을 풀게 되었다”라고 서울의 정세를 설명한 후 독립 만세를 외치자고 제안하였다. 이들은 태극기 10기를 제작하면서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창순(任昌淳)·임철재(任哲宰)·김세환(金世煥)·김필현(金弼鉉)·윤구학(尹龜學)·이건호(李建鎬) 등이 합류하였다. 백곡리에서 서정리로 함께 나간 이들은 오후 3시경 홍범섭 등 주도 인사들이 손을 잡고 약 10명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장으로 들어갔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경계를 강화하고 시장을 감시하던 정산헌병주재소 헌병들이 만세군중을 제지하며 해산을 강요하자 일단 시장에서 물러났다. 약 15분 후 주도 인사들이 선두에 서서 다시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흔들면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장으로 재진입을 시도하였다. 군중 100여 명이 호응해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헌병들의 제지에도 시장 일대를 활보하였다. 군중을 해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헌병들은 만세 군중을 이끄는 주도 인사와 선두에 서 있는 30여 명을 체포해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이에 만세 군중은 헌병들을 뒤따라 주재소로 가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700여 명으로 늘어난 군중이 점점 격렬해지자, 헌병들은 2차례 공포탄을 발사하면서 위협하며 해산을 명령하였다. 이때 선두에 있던 정산향교 직원(直員)인 권흥규(權興圭)가 나서서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다 헌병들이 쏜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4월 6일 주민들은 헌병들로부터 권흥규의 시신을 인수해 자택인 목면(木面) 안심리(安心里)로 운구하였다. 족친(族親) 권영진(權寧鎭)이 쓴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 명정(銘旌)과 많은 만장을 앞세운 운구 행렬은 서정리에서 안심리로 가는 길목마다 노제를 지냈다. 지곡리(池谷里)에서는 권영진이 만든 ‘독립 만세’ 깃발과 정일택(鄭一澤)이 만든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포하고 흔들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한편, 일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청양 헌병과 공주 수비대를 지곡리에서 목면으로 가는 고개에 배치하였다. 만세를 부르는 운구 행렬이 다가오자, 헌병과 수비대는 행렬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최윤안(崔胤安)·유행길(柳行吉)·장응렬(張應烈)·윤광원(尹光猿)·김국삼(金國三) 등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또한 같은 날 광생리(光生里)·대박리(大朴里)·해남리 등 마을에서 500명의 주민이 독립 만세를 외쳤다. 4월 7일 오후 9시경 와촌리(瓦村里)·내초리(內草里) 등 3개 마을 주민 약 500여 명이 ‘만세봉’에 올라 불을 피우고 독립 만세를 외치는 횃불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5일부터 7일까지 3일 동안 전개된 정산면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정산헌병주재소의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청양헌병분견소로 압송되어 1919년 4월 24일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의 처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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