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환
高龍煥1887 ~ 미상
지도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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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3.1운동
- · 물산장려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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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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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5) 1887년경 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 평산면(坪山面) 용전리(龍田里)에서 태어났다. 한자가 다른 ‘고용환(高容煥)’이란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918년 베이징법제대학(北京法制大學)을 졸업하였다. 만주 터우다오거우(頭道溝) 지역에서 항일 활동을 하던 고동환(高東煥)의 동생으로 1919년 당시 중국 간도(間島) 핑강사(平崗社) 투청허우촌(土城後村)에 거주하였다. 베이징(北京)에서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듣고, 중국 학생들과 제휴하여 ‘한국 독립운동’의 전개, 중국에서의 일본 치외법권 철폐 등을 함께 추진하기로 협의하였다. 1919년 1월 이문성(李文成)을 일본 도쿄로 보내 한국인 유학생을 포섭하려 하였고, 방성흡(方成洽) 외 10명은 국내로, 3명은 러시아 지역으로, 5명은 지린성(吉林省) 방면으로 보냈다. 이들을 보낸 후 1월 중순 베이징에서 출발하여, 톈진(天津)·상하이(上海)를 거쳐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에서 약 1주일간 머물며 동지들과 독립운동에 대해 협의하고 2월 16일 간도 핑강의 자택으로 돌아갔다. 이후 형 고동환과 함께 상하이의 이용(李鏞), 서울의 이종호(李鍾浩) 등과 연락을 취하며 간도 지역에서 동지 규합과 항일운동에 힘썼다. 1919년 2월 18일과 20일 옌지현(延吉縣) 쥐즈가(局子街) 샤창리(下場里) 옌지도윤공서(延吉道尹公署) 외교과원 박동원(朴東轅) 집에서 이홍준(李弘俊)·이성근(李聖根)·김영학(金永學)·김정(金精)·백유정(白瑜晶)·유예균(劉禮均)·박경철(朴敬喆)·구춘선(具春先)·이성호(李盛浩)·고평(高平)·최봉렬(崔鳳烈)·박정훈(朴貞勳)·이동식(李東植) 등 32명과 함께 비밀 회합을 갖고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향후 민족운동의 방향과 내용을 협의하여 결정하였으며, 일본 군경에게 체포되거나 희생될 경우에도 끝까지 일제와 결사항쟁을 맹세하는 뜻에서 혈서를 쓰기도 하였다. 3월 7일 국내의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동지들과 함께 3월 13일 룽징촌(龍井村) 북쪽의 서전벌에서 ‘조선독립축하회’라는 이름으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주요 임원을 선출하고 준비에 착수하였다. 3월 13일 대회 부회장 배형식 목사의 개회 선언에 이어 대회장 김영학이 ‘간도 거류 조선 민족 일동’ 명의로 된 「독립선언 포고문」을 낭독하고, 군중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날 만세 시위운동으로 17명이 희생·순국하였다. 이에 구춘선 등과 함께 쥐즈가에 머물면서 일본 영사관과 결탁하여 많은 살상자를 낸 옌지도윤공서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날 밤 주요 지도자들이 옌지(延吉)에 모여 ‘조선독립기성회’를 결성하고 북간도의 모든 독립운동을 조직화하기로 결의하였다. 의사부(議事部)·재정부(財政部)·편집부(編輯部)·교제부(交際部)·교통부(交通部)·경위부(警衛部) 등 6부를 설치하고, 총본부는 당분간 쥐즈가에 두기로 하였다. 유예균·박정훈·김약연(金躍淵) 등과 함께 의사부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함남 북청 고향으로 돌아와 북청청년회(北靑靑年會)에서 활동하며 1920년 조선청년회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0년 12월 1일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청년회연합회 발기총회가 열리고, 다음 날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회를 구성하는 집행위원과 의사회를 구성하는 의사(議事) 등 간부를 선출할 때, 의사회를 대표하는 의사장에 선출되었다. 이 일로 함남 북청경찰서에서 취조를 받기도 하였다. 1922년 4월 4일부터 3일간 진행된 조선청년회연합회 제3회 정기총회에서는 최순탁(崔淳鐸)·김철수(金喆壽)와 함께 상무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조선청년회연합회 순강대(巡講隊)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5월 20일 함남 신흥군에서 「문화생활과 청년의 책임」이란 강연을 하였다. 6월부터는 박희도(朴熙道)·나경석(羅景錫)·김철수와 함께 경기도 수원·안성, 충청남도 온양·청양·예산·서산·보령·논산·부여·공주·천안 등지를 순회하며 「시대적 생활」, 「청년회연합회 사업」, 「연합생활의 필요」, 「연합의 능력」, 「신세계의 여명」, 「신생활의 요건」, 「연합회의 사명」, 「오인의 책임」, 「신청년이 되어」, 「우리의 희망」, 「청년의 각성」, 「세계 대세와 오인의 생활」 등의 주제로 강연을 이어나갔다. 1923년 1월 9일 조선청년회연합회 사무실에 30여 명이 모여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獎勵會) 발기준비회를 조직할 때, 정노식(鄭魯湜)·이종린(李鍾麟)·나경석·백관수(白寬洙) 등 9명과 함께 준비위원에 선임되어 조선물산장려회 창립을 준비하였다. 1월 20일 서울 낙원동 협성학교에서 50여 명이 모여 조선물산장려회 발기총회가 개최되었다. 임시의장 설태희(薛泰熙) 사회로 진행된 발기총회에서 이종린·정노식 등과 함께 창립준비위원이 되었다. 1월 23일 속개된 창립총회에서 설태희·이종린·나경석·백관수 등과 함께 20명의 이사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월 25일 열린 조선물산장려회 제1차 이사회에서 경리부·조사부·선전부 중 선전부에 이종린·이갑성·박동완 등과 함께 소속되었다. 4월 30일 제1회 정기총회에서도 이사에 선출되었다. 5월에는 이사회에서 나경석·송진우·설태희 등과 함께 소비조합설립준비위원으로 선출되어 소비조합 설립 방안을 검토하였다. 1924년 4월 30일 제2회 정기총회에서 다시 이사가 되었다. 다만 이때부터 조선물산장려회는 완전 침체에 빠졌고, 최고 운영기구로서 실무와 재정을 책임진 이사회는 휴무 상태가 되자 이후 조선물산장려회 활동을 그만 두었다. 1923년 3월 29일부터 3일간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設立期成會) 발기총회와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발기총회에서 서무 분야에 대한 경과를 보고하였다. 3월 31일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 감사위원, 회금보관위원, 지방순회선전위원 등을 선임하였다. 이때 이상재·이승훈 등과 함께 30명의 집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4월 2일 민립대학기성회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위원장과 상무위원을 호선할 때, 이승훈·한용운 등 7명과 함께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한편, 3월 30일에는 함남 지역에서 참석한 인사들과 만나 교육·산업·사회문제 등을 가지고 1개월 이내에 함흥에서 도민대회를 열기로 의결하고 준비위원을 선거하였다. 한승교(韓承敎)·박용하(朴鎔夏) 등과 함께 준비위원에 선출되었다. 8월에는 지방부 설치 임무를 띠고 함남 일대를 순회하였다. 1924년 4월 14일 자 『시대일보』에 「위기일발의 우리 사회」라는 글을 게재하였다. 『시대일보』 편집 겸 발행권을 새로 넘겨받은 측에서 1924년 8월 10일 개최한 발기인회에서 정관을 작성하고 임원을 뽑을 때, 남정철(南廷哲)·임경호(林敬鎬) 등과 함께 이사에 선임되었다. 1927년 7월 3일 신간회(新幹會) 북청지회(北靑支會) 설립총회에서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28년 1월 15~16일 열린 북청지회 제2회 정기대회에서 조직선전부 총무간사가 되었으며, 주익(朱翼)·이춘균(李春均)·이시완(李時琓)과 함께 신간회 본부 대표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28년 2월 15일 서울에서 개최된 신간회 창립 1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1929년 1월 20일 열린 북청지회 제2회 정기대회에서도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주익·이춘균·김사익(金士翼)과 함께 신간회본부 대회 출석 대의원에 선임되었다. 1932년에는 고향 북청에서 한국종(韓國鍾)·한기선(韓基善)·김병섭(金秉燮) 등이 북청여자보통학교 강당에 야간 과정으로 설치한 ‘중국어학원’의 강사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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