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
金敎臣1901. 3. 30 ~ 1945. 4. 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0)
관련 사건
- · 성서조선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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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10) 1901년 3월 30일 함경남도 함흥군(咸興郡) 주남면(州南面) 사포리(沙浦里)에서 아버지 김염희(金念熙)와 어머니 양신(楊愼)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전통적인 유학자 집안이며, 말에 탄 채로 왕궁에 출사하는 것이 허락될 정도로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그러나 3세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유년 시절에는 유교적 교육을 받아 『사서오경(四書五經)』등을 공부하였다. 이후 공립 함흥보통학교(咸興普通學校)에 입학하였다. 1912년에 결혼하고 1916년 함흥공립농업학교(咸興公立農業學校)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던 시기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곧 바로 함흥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보통학교에 보내는 등 3·1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행동으로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았고 가택 수색을 받기도 하였는데, 수색 당시 집에서 권총과 대한제국(大韓帝國) 시기 교과서가 발견되어 문제가 되었다. 이후 외가의 도움으로 일본 도쿄(東京)로 유학을 떠났다. 도쿄에서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하여 대학 진학을 준비하였다. 1920년 4월 18일 처음으로 기독교를 접하였고, 6월경 도쿄의 우시코메구(牛込區) 야라이마치(失來町) 홀리네스 교회에서 시미즈 준조(淸水俊藏)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교회 내의 세속적인 권력투쟁으로 시미즈 목사가 쫓겨나자 실망하고 1920년 11월 교회를 떠났다. 이러한 교회 내분으로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가 생겼으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무교회주의’를 접하면서 믿음이 확고해졌다. 무교회주의란 제도화된 교회가 구원의 매개체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신도들의 회합’이나 ‘성도의 영적 단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 운동을 의미한다. 우치무라의 욥기 강연을 듣고 기독교 신앙생활에 대한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22년 4월 도쿄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 영어과(英語科)에 입학한 후 1923년 지리·박물과(地理·博物科)로 전과(轉科)하였다. 1924년 일본으로 유학 온 함석헌(咸錫憲)과 송두용(宋斗用) 등이 우치무라의 모임에 참석하게 되면서 이들과 함께 한국인 유학생 6명이 ‘조선성서연구회(朝鮮聖書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조선성서연구회에서 일본어·영어·독일어·희랍어·히브리어 성서를 참고하면서 한국어 성서를 연구하고, 한국에 있는 무교회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일본 유학 중에도 방학 때는 귀국하여 전도하거나 모교에서 계몽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을 지닌 문중에서 무교회주의의 기독교 신앙을 가진 종손은 인정받지 못하였다. 또한, 제사 문제로 인해 문중에서 거의 제적당하게 되었다. 1927년 3월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고향인 함흥의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永生女子高等普通學校)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7월에는 『성서조선(聖書朝鮮)』 창간에 참여하여 1년에 네 차례 발행하다가 1929년 8월(제8호)부터는 매월 발행하였다. 1928년 3월, 서울의 양정고등보통학교(養正高等普通學校)의 교사가 되어 가족 모두 서울로 이주하였다. 1928년부터 정상훈·양인성·송두용 등과 부산에서 신의주(新義州)까지 전도 여행을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1930년 5월부터 『성서조선』의 주필이 되어 집필, 교정, 인쇄, 우송 등 사무 일체를 도맡았다. 또한 이 시기 ‘무교회주의’의 대표자로 기성 기독교계와 충돌하였다. 대표적으로 스승이었던 우치무라에 대한 김인서(金麟瑞) 목사의 비판을 두고 기성 기독계와 논쟁을 벌였다. 이후 1935년 3월부터 7월까지는 장도원과 ‘성서조선 운동’ 노선에 대한 불일치로, 1936년 9월부터 11월까지 최태용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우치무라의 영향으로 한국 내 ‘무교회주의’ 대표자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오해를 사기도 하였으나, 1934년 4월 이후 『성서조선』을 통해 한국인 스스로 깨닫고 만든 기독교를 가져야 한다는 ‘조선산 기독교’를 주장하였다. 1934년 4월 『성서조선』 제63호에서 ‘조선산’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하고, 1935년 10월 제81호에는 ‘조선산 기독교’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함석헌 등과 함께 시작한 겨울성서연구회에서는 ‘조선 역사’에 대한 강연을 통해 민족의식 고취에 나섰다. 이때 이루어진 강연을 『성서조선』에 연재하였고, 1950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라는 제목의 책으로 간행되었다. 양정고등보통학교의 지리 수업 시간에는 인물과 역사 위주로 가르치며 ‘조선에 대한 재인식’을 심어주는 데 노력하였다. 1934년 여름 등산부에 가입하고 함석헌과 학생들도 동참시켜, 한국의 국토를 통해 한국의 역사, 한국인의 정신, 한국인의 마음과 생활을 가르치고자 하였다. 당시 양정고등보통학교는 운동부가 활발한 학교였는데, 농구부의 감독 겸 교직원 정구 선수로 활동하였다. 양정고등보통학교는 뛰어난 육상선수를 여럿 배출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孫基禎)이다. 1935년 10월에는 개교 30주년 기념으로 농구부를 이끌고 도쿄에 가서 일본의 한 중학교 농구부와 시합을 벌였는데, 이때 도쿄에서 메이지신궁대회(明治神宮競技大会) 마라톤에 출전하러 온 손기정을 만나 격려하기도 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며 전시체체(戰時體制)가 시작되었고, 강압적인 통제사회 하에 『성서조선』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엄격한 검열을 받아 10여 차례에 걸쳐 휴간, 기사 삭제 및 불허가 처분 등을 받았다. 1939년 11월에는 창씨개명이 강행되었고, 학교 교육에서 한국어 사용이 금지되고 일본어 상용 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지만 창씨개명에 절대적인 반대를 표명하고, 수업 시간에는 일체 일본어를 쓰지 않고 한국어로 수업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조선총독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시가 더욱 심해졌다. 한편, 1939년에는 최용신의 생애 조명과 민족정신 선양을 위하여 제자 류달영(柳達永)에게 『최용신 소전』 집필을 맡겼다. 류달영이 수원고등농림학교 출신으로 최용신의 활동 지역과 가까웠고 수원고농 내 학생 단체와 최용신이 생전에 적지 않은 교섭을 가졌던 점에서 집필을 맡겼다. 책 발간을 위해 최용신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집필을 도왔다. 출판 이틀 만에 초판 1,000부가 전부 매진되는 기록을 세웠다. 1940년 3월 양정고등보통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무교회주의’ 운동과 『성서조선』 발행에 전념하다가, 1940년 9월 선배의 권유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의 교사로 교직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황민화정책’에 철저히 반대하며 한국어 수업을 계속하자 교내에서 문제가 되어, 6개월만에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1941년 10월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松都高等普通學校)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12월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며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매년 겨울마다 열렸던 성서강습회를 진행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42년 3월 30일 『성서조선』 제158호의 권두언에 「조와(吊蛙, 개구리를 애도함)」라는 제목의 글이 문제가 되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경기도경찰부에서 취조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와 함께 『성서조선』은 과거 간행호도 전부 압수되었고 출판은 금지되었다. 또한 『최용신 소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성서조선』과 관련이 있었던 400여 명이 검거되었으나 대부분 곧 풀려났다. 함석헌·송두용·류달영 등과 함께 1년 간 가혹한 고문을 받으며 수감되었다. 1943년 3월 29일 불기소 처분을 받으며 1년 만에 출옥하였다. 출옥 이후 1년 동안 만주(滿洲)의 목장과 경남 진영(進永)의 소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휴식 기간을 보냈다. 1944년 7월 함남 흥남에 위치한 일본질소연료공업주식회사(日本窒素燃料工業株式會社) 용흥공장(龍興工場) 근로과에서 일하게 되었다. 직공 및 가족 약 5,000명의 복리시설을 관리하고 훈육 지도하는 일을 맡았는데, 일손이 부족하자 함석헌과 제자 류달영 등을 불러 함께 일하였다. 공장에 근무하는 동안 밤에 야학을 열어 부녀자들과 문맹자들을 가르쳤고, 매월 8일과 18일에는 사택촌의 부녀자들에게 생활 상식과 위생에 대해 강연하였다. 그러나 1945년 4월 25일 발진티푸스로 사망하였고, 법정 전염병이어서 하루 만에 화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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