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권일
金權一1925. 10. 15 ~ 1946. 11. 2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독립청년단
포상 정보
- · 애족장(2013)
관련 사건
- · 재오사카조선인민족공산주의그룹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3) 1925년 10월 15일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천가면(天加面) 성북리(城北里, 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성북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재오사카가덕인친목회(在大阪加德人親睦會)와 가덕인청년부회(加德人靑年部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한 김근도(金根道, 金光根道)이다. 이명은 금광권일(金光權一)이었다. 유년기에 부모를 따라 오사카(大阪) 니시나리(西成) 나카비라키(中開)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부친에게서 국제올림픽대회에서 보여준 한국민의 우수성, 독립운동 투사들의 활약상, 국외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의 활동 등을 배웠다. 또한, 부친으로부터 “공산당은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의 독립을 지원할 뿐 아니라 피압박민족과 피착취 계급의 해방을 이루기 위해 공산주의사회의 실현을 목표로 투쟁하고 있다. 조선 민족은 이 공산당, 소련의 지원을 얻으면 조선 독립의 목적은 달성되는 고로 장래 조선 독립운동은 공산당 조직에 결합하는 방법을 채용하고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여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해야 한다”라는 말을 들고 자랐다. 일제에 의해 차별과 압박을 받아 한국 농민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일제의 통치권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한국 청년을 계몽하고 세력을 결집하기로 결의하였다. 1938년 7월 오사카 이토법랑공장(伊藤琺瑯工場)의 철기제조 직공으로 취업하여 한국인 직공 중 함께할 동지를 규합하였다. 직장 동료인 정학송(東原鶴松)·한귀동(韓貴童)을 동지로 규합하여 구체적인 운동 방침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우선 만주사변의 과정에서 일본의 국력이 저하된 사이 한민족이 봉기하여 일제의 패전을 이끌어 독립을 달성하고, 청년층을 중심으로 강고한 공산주의적 독립운동 그룹을 결성하여 소련의 지원을 받는다는 계획에 대해 협의하였다. 그후 이토법랑공장의 책임을 한귀동에게 맡기고, 다른 동지를 모으고자 다른 공장에 취업하였다. 1939년 9월 요시와라법랑주식회사(吉原琺瑯鐵器株式會社)에 들어가 그곳에서 안장준(安張俊, 安川張俊)·이찬호(李讚浩, 國本讚浩)·이찬귀(李贊貴)를 동지로 규합하였다. 이들과 함께 일본의 민족 차별을 규탄하고 민족의식의 고양을 위해 노력하였다. 같은 해 10월 요시와라법랑공장 내에 조선독립청년단을 결성하여 이토법랑공장의 조직을 분회로 두었다. 조선독립청년단 기관지인 『전기사(戦旗社)』를 발행하고, 「조선 문제」 등을 텍스트로 하여 연구회를 열고 자금 획득 방침, 공산주의 투쟁의 목표, 일본의 경제 봉쇄에 대한 투쟁 방법 등을 논의하였다. 1940년 4월부터 다카키도쿠다로금속공장(高木德太郞金屬工場)에 취직하여 8월경까지 직공 김두평(金斗平)을 단원으로 규합하여 조직 활동을 전개하였다. 오사카의 한국인 노동 청년들을 결집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40년 11월 19일 재오사카조선인민족공산주의(在大阪朝鮮人民族共産主義) 그룹 검거 당시 정학송·한귀동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1941년 5월 30일 오사카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보내져 체포된 지 2년 1개월 만인 1942년 12월 9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이상 3년 이하를 선고받았다. 옥고를 겪다 일제가 패망한 이후 석방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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